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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일리천 전투. 고려에 여러가지 운이 겹치면서 손쉽게 후백제를 멸망시켜버린 후삼국시대를 종결짓는 마지막 전투

by 사탐과탐 2024.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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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에 여러가지 운이 겹치면서 손쉽게 이겨버린 후삼국시대를 종결짓는 마지막 전투
일리천 전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934년 왕건은 백제의 운주성을 공격해

유금필의 야습으로 대승을 거두게 되는데요

 

후백제군의 핵심전력이던 최정예 기병 3000여명을 사살하고

백제의 많은 장수들을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이후 웅진 북쪽의 30여개 성마저 모두 고려에 투항해버렸고

후백제는 그렇게 충청도 지역을 빼앗기게 되죠

 

결국 후삼국의 주도권은 고려가 차지하게 됩니다

 

한편 후백제의 견훤의 입지도 줄어들게 되는데

이때 장남이던 견신검이 모반을 일으켜

아버지인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자신이 후백제 왕위에 오르는 사건이 발생했죠

 

이렇게 후백제의 상황이 뒤숭숭한 가운데

고려는 나날이 상황이 좋아지고 있었는데요

 

신라의 경순왕이 대세가 고려로 기울었음을 느끼고

고려에 항복하면서 신라 지역마저 고려땅이 되었고

멸망한 발해의 세자 대광현이 무리를 이끌고 고려에 귀순해오면서

고려는 후삼국의 3분의 2의 영토를 평정했으며

이제 남은 것은 후백제 하나뿐이었죠

 

그리고 왕건은 후백제에게 빼앗겼었던 나주일대를 되찾기위해

유금필에게 출진을 명했고

그렇게 유금필은 고려수군을 이끌고 가

나주 지역 일부를 다시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이때 금산사에 감금되어 있던 견훤이 나주로 탈출했고

유금필은 그를 데리고 고려로 돌아오게 되었죠

 

그리고 이를 두번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라 생각한 왕건은

고려의 모든 병력을 총 동원해 백제로 공격해 들어갔으며

그렇게 후삼국시대를 종결짓는 최후의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이는 한반도에 있던 국가들끼리 벌인 전쟁 중에서

역사서에 기록된 한국사 최대규모의 전투이기도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전투는 바로 '일리천 전투' 입니다

 

일리천 전투는 고려와 후백제의 운명을 건

최후의 대 격전이었는데요

 

오늘은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통일왕조를 세울수 있었던 마지막 전투

일리천 전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견훤이 아들 신검에의해 유폐되기 전까지는

고려가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당해내기엔 굉장히 어려웠죠

 

견훤은 당대 최강의 무장이었던데다가

당시 후백제는 한반도 남부의 곡창지대를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때 신검의 반란이 일어났고 견훤이 유폐되면서

후백제를 멸망시킬 하늘이 내린 절호의 기회가

왕건을 찾아왔던 것이죠

 

견훤이 고려로 찾아오자 왕건은 그를 상보라고 부르며

극진히 대접했는데요

 

그런 후한대접을 받은 견훤은 자신을 배신한 아들을 벌할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한뒤

후백제 침공에 적극 협조하겠다고 약속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936년, 왕건은 동원할수 있는 병력을 모두 동원해

후삼국시대 최대규모의 병력인 약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후백제 침공을 시작했죠

 

뿐만아니라 왕건 휘하엔 태자 왕무와 홍유, 박술희,

왕순식 그리고 유금필, 박수경 등까지

고려의 당대 최고 호걸들이 참전하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견훤도 자신의 아들을 벌하고

자신이 세운 나라를 스스로 멸망시키기 위해

왕건과 함께 출진하게 되었죠

 

이때 견훤은 전 후백제왕으로써 태자 왕무 이상의 대우를 받았으며

왕건과 함께 같은 자리에서 고려군을 사열할 자격까지 받았고

그리고 좌군 기마병 1만의 지휘관이 되어 후백제로 향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이때 고려군의 병력수가

<삼국사기>와 <고려사>에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삼국사기에는 107,500명, 고려사에는 87,500명이 기록되어 있죠

 

그런데 이 병력수는 과장되어 실제보다

훨씬 부풀려져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때보다 더 과거에 고려는

대체로 1만명 남짓한 병력만을 동원했었기 때문에

10만명을 갑자기 동원한건 말도 안된다는 주장이죠

 

그러나 견훤이 항복해 온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후백제를 확실하게 끝내버려야겠다는 왕건의 판단으로

무리해서라도 막대한 수의 병력을 동원했을거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어쨌든 고려는 동원할수 있는 최대치의 군사를 모아

백제로 쳐들어갔고 천안부에서 고려의 모든 병력이 합세한뒤

일선군으로 진격했죠

 

이에 견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도 후백제의 모든 전력을 총동원해

약 65,000여명에 이르는 대군을 이끌고 고려군과 맞섰고

양군은 일리천(경북 구미 선산읍 일대)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후백제의 문제가 있었으니

견신검에 의해 이복동생이던 견금강이 살해당하고 말았는데

금강은 전주지역 호족을 외척으로 두었었기 때문에

전주지역의 호족들이 후백제와 견신검에게 등을 돌리게 된 것이었죠

 

그러다보니 후삼국 성립이후 계속 병력면에서 우위를 지키고 있던 후백제는

이젠 병력면에서도 열세에 처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불리한 상황에서 고려군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대치했을때

후백제군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고 마는데요.

 

바로 고려군 좌군에 자신들이 얼마전까지 왕으로 모시고 있던 견훤이

적진의 장수로써 떡하니 서있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그러자 병사들은 당황하며 싸울 의지를 잃게 되었고

심지어 선봉이던 애술과 효봉, 덕술과 명길 등의 장수들이

견훤을 보자마자 그대로 고려군에 투항해 버렸죠

 

뿐만아니라 효봉은 "신검이 중군에 있으니

좌우로 협공하면 반드시 그를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신검을 공격할 계책까지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거기다가 후백제군의 우군을 이끌던 견훤의 사위 박영규는

전투가 벌어지면 바로 고려군으로 투항하겠다고

약속을 해놓은 상태였기에

서로의 국운을 건채 엄청난 병력을 이끌고

맞붙은 양군의 전투 승패는

싸우기도 전에 이미 확정되어 버린 셈이었죠

 

이후 왕건은 곧바로 신검이 있는 후백제의 중군을 공격하라 명했고

고려군이 일제히 전진해 후백제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나름대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고려 중군의 선봉은 바로

한번도 전투에서 패하지 않았던 유금필이었기에

후백제군의 장수 흔강과 견달 등을 비롯해

약 3,000여명을 포로로 붙잡았고

6,000여명을 죽여버리는 엄청난 전공을 세웠죠

 

뿐만아니라 후백제군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나

자기네들끼리 싸움이 벌어지는데요

 

견훤이 적국 지휘관이 되어 나타난 데다가

이미 패배의 그림자가 짙어지자

후백제군의 일부가 반기를 들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막아내느라 후백제군 내에서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웠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도망친 자는 헤아릴수 없을정도로 많았다고 하죠

 

그렇게 후백제의 중군이 완전히 개작살 나버리자

견신검은 겨우 목숨만 살아 도망을 쳤는데

고려의 추격군에 의해 마성 (익산 미륵산성)에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다 전력도 엄청나게 열세한 상황에

견훤의 등장으로 사기까지 너무 떨어지다보니

더이상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신검은 결국 고려에 항복했고

그렇게 후백제도 멸망하고 말았죠

 

이후 백제의 장수들 대부분이 처형당했으며

신검의 동생이던 양검과 용검도 유배를 간 뒤 얼마후 처형당했습니다

 

하지만 신검은 왕건의 용서를 받아 목숨은 건졌는데

이 이후부터 신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그의 행적을 알수 없지만

결국 처형엔딩으로 끝났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죠

 

견훤은 왕건이 신검을 살려준걸 보고

울화통이 터져서 결국 얼마 안가 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수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은 왕건은

결국 이 일리천 전투를 마지막으로

후삼국시대의 종지부를 찍어 후삼국을 통일했고

드디어 통일 왕조 고려의 역사가 시작되게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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