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에서는 장비가 시작부터 무엇을 했는지 정확하게 설명해 놨지만 실제 역사서에는 장비의 초반부에 대한 기록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많아서 그거 어떤 사람이었는지 추측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요
때문에 장비가 어떤 출신성분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가 없으며 그저 유비와 같은 동네 출신이라는 것 정도가 확인되었다고 하죠
또 삼국지연의에서는 유관장 삼형제가 도원결의를 맺은 반면에 정사에서는 유비 관우 장비가 의형제였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만 그 셋이 서로에게 특별히 각별하게 대했다는 기록은 많다고 하죠
어느 날 유비가 군대를 모으자 관우와 장비는 유비의 아래로 들어갔고 유비는 그런 두 사람과 함께 같은 침대를 쓸 정도로 그들을 형제처럼 대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유비와 무척 가까운 사이가 된 후에도 관우와 장비는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하루종일 유비의 곁에 서서 그를 지켰고 이후 떠돌이 생활을 하는 유비를 따라다니며 온갖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갔다고 하네요
196년 연의와 똑같이 유비가 서주를 노리는 원술을 막기 위해 자리를 비우게 되자 장비는 도겸의 옛 부하이자 하비의 상인 조표와 함께 하비를 지키게 됐는데 장비와 크게 다투게 된 조표가 여포를 불러들이는 바람에 장비는 유비의 가족들을 남겨둔 채 도망을 쳐버렸다고 하죠
이후 여포가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후 조조의 아래에 있던 유비는 조조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소패로 떠나게 되었는데 이때 장비는 여포 밑에 있다가 조조에게 항복한 진의록이라는 장수에게 자신들과 함께 떠나자는 제안을 합니다
진의록에게는 매우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는데 하비성을 점령한 조조는 진의록의 아내의 미모에 반해 그녀를 자기 아내로 삼아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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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장비는 진의록에게 어찌 아내를 빼앗아간 자를 섬길 수 있겠냐며 그를 설득한 것인데요
그런데 문제는 유비의 밑으로 들어간 진의록이 얼마 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는 다시 조조에게로 돌아가려고 하자 장비가 그런 진의록을 가차 없이 죽여버렸다는 것입니다
이후 유비가 서주에서 조조에게 패한 후 원소와 유표의 아래로 들어갔던 시기에 장비는 하후연의 조카딸인 하후씨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을 할 당시 그녀의 나이가 13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비가 그녀를 납치해 혼인을 올린 것이라는 썰과 정략결혼을 했다는 썰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위나라에서 장비를 끌어들이기 위해 하후씨와 혼인을 시켰지만 장비가 혼인을 한 후 위나라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유비를 따라가 버리자 화가 난 위나라에서 장비가 하후씨를 납치해 결혼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죠
유표가 죽은 후 조조가 형주로 쳐들어오자 유비는 강남으로 달아났고 얼마 후 조조군이 추격을 시작하면서 마침내 장판파에서 유비를 따라잡게 되죠
유비는 조조군이 등뒤까지 왔다는 말을 듣자 아내와 자식들까지 버린 채 달아나면서 장비에게 병사들을 끌고 물가에 있던 다리를 끊어버리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장비는 다리를 끊어버린 채 강을 등지고는 눈을 부릅뜨며 달려오는 조조군을 향해 "내가 장익덕이다 앞으로 나와 생사를 가름하자!"라며 소리쳤고 그런 장비의 모습에 겁을 먹은 조조군은 감히 접근을 하지 못했다고 하네요
기록에 나와있는 내용은 이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자세한 상황까지는 알 수 없지만 조조군의 정예 기병대인 호표기가 무려 수백 명이나 있었음에도 고작 20명의 병사를 거느린 장비에게 덤비지 못한 것을 보면 당시 장비의 명성이 어느 정도였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죠
연의에서는 적벽대전에서 주유가 조조를 상대로 이길 때 유비는 그저 강건너에서 불구경을 하다 도망가는 조조를 쫓은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유비도 적벽에서 오나라와 함께 싸웠으며 장비 또한 관우 조운등과 함께 많은 활약을 했을 거라 예상됩니다
서촉을 정벌하러 떠난 유비는 방통을 잃은 후 급히 제갈량을 불러들였는데 이때 장비는 제갈량과 함께 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주변의 군현들을 평정했죠
강주에서는 유장의 장수인 파군태수 엄안을 격파하고 산 채로 그를 붙잡은 후 왜 항복하지 않고 맞섰냐며 엄안을 꾸짖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엄안은 우리 땅을 침략해 온 것은 너희들인데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너희에게 항복을 하지는 않겠다며 호통을 쳤죠
그 말을 듣고 화가 난 장비는 당장 엄안을 죽이라고 소리쳤지만 태연하게 장비를 보던 엄안은 그냥 죽이면 될 것을 왜 쓸데없이 화를 내냐며 오히려 장비를 꾸짖었습니다
그런 엄안의 기개를 보고 감탄한 장비는 마음을 바꿔 엄안을 풀어주고 그를 유비군으로 받아들입니다
연의에서 나온 것처럼 엄안이 앞장서서 옛 동료들을 설득하며 그들을 유비군으로 항복시켰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후 장비가 지나가는 곳마다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봤을 때 장비가 엄안에게 촉의 장수들을 설득해 달라는 부탁을 했을 가능성도 높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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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장비는 유비가 촉을 점령하는데 큰 공을 세우면서 익주가 평정된 후 많은 상을 받고 파서태수에 봉해졌습니다
하후연과 함께 한중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장합은 어느 날 군사들을 끌고 파서와 파동지역을 점령한 후 그곳의 백성들을 모두 한중으로 옮기라는 조조의 명을 받게 되었고 소식을 들은 유비는 파서태수 장비를 보내 장합과 맞서게 했죠
자치통감에 따르면 장비는 50일이 넘게 장합과 대치하고 있다가 장합을 습격해 그의 부대를 크게 격파했고 장합은 패배 후 달아나게 됩니다
장비전에 의하면 장비는 1만의 정예병을 이끌고 샛길을 따라 이동해 좁은 산길을 지나가던 장합의 부대를 습격했는데 산길이 워낙 좁았기 때문에 뒤에 있던 장합의 병사들은 공격받은 부대를 신속하게 도와주러 갈 수가 없었고 그렇게 각개격파를 당한 장합은 결국 말을 버린 채 10여 명의 부하들만 데리고 산을 타며 도망간 끝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하네요
장합은 위나라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의 명장이자 전략가인데 장비가 그런 장합을 상대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 것으로 봤을 때장비는 단순히 무력만 뛰어났던 장수가 아니라 전략을 짜내고 병사들을 다루는데도 뛰어났던 지휘관이었음을 알 수 있죠
이후에는 장비가 한중 공방전 때 뭘 했는지 나오지 않지만 한중을 얻기위해 유비까지 직접 나섰던 전투인 만큼 장비 또한 유비에게 합류해서 많은 활약을 했을것으로 짐작됩니다
한중 공방전의 승리 후 한중왕의 자리에 오른 유비는 장비를 사방장군 중의 우장군으로 임명했는데 나머지 세자리는 바로 관우와 마초 황충이었죠
연의에서는 이를 모티브로 삼아 조운까지 더한후 오호대장군이라는 가상의 관직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한중왕이 된 유비가 본거지인 성도로 돌아가면서 한중의 태수 자리를 장비가 아닌 위연에게 줬다는 것인데요
많은 사람들은 장비가 한중태수가 될 것이라 여겼고 장비 또한 속으로는 그자리에 자신이 앉게될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유비가 위연을 한중태수로 삼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고 하죠
다만 이 일을 유비가 나이가 많은 장비 대신 위연을 중용하면서 장비를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기 위해 했던 행동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유비가 장비를 견제해서 그런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비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한 행동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합니다
당시 장비는 파군 일대를 지키고 있었는데 파군은 익주의 중심부이자 익주 곳곳으로 발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요충지로서 만약 익주 내부에 일이 터지거나 한중이나 성도 등의 주요 도시가 위험해질 경우 장비가 빠르게 출동해 사건을 해결하기 가장 좋은 위치였죠
유비는 이전부터 본인이 가장 신뢰하는 인물을 최후방 요충지에 두고 본인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싸우는걸 좋아하는 스타일의 군주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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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에 있을 때는 관우에게 하비성을 맡겼고 촉으로 떠날때도 관우에게 형주를 맡겼으며 이릉대전때도 자신이 가장 믿는 제갈량과 조운에게 파촉 지방을 맡겼었죠
때문에 한중공방전이 끝난후 파서 지방에 장비를 그대로 놔둔것도 유비가 가장 믿는 장수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장비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평소에 자신을 따르는 병사들을 너무 거칠게 대했다는 것인데요
유비 또한 장비의 이런 성격을 걱정해 "경이 지나친 형벌을 내려 병사들을 죽인 것이 벌써 여러 차례인데 아직까지도 매일 가까이 있는 병사들에게 채찍질을 한다고 하니 이것은 스스로 화를 초래하는 길이오"라며 장비에게 여러 차례 경고를 했지만 장비는 끝내 나쁜 버릇을 고치지 않았고 결국 이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됩니다
221년 6월 유비가 오를 정벌하러 떠날 때 장비는 군사 1만 명을 데리고 낭중에서 출발해 강주에서 유비와 만나기로 했는데 출발을 하기 직전에 장비 밑에 있던 장수인 장달과 범강이 장비를 죽인 후 그의 목을 들고 오나라로 달아나버리는 사건이 있었죠
평소 장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유비는 장비군에서 보낸 사람이 왔다는 말만 듣고는 장비가 죽은 것을 직감하며 슬퍼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평소 장비의 나쁜 버릇으로 봤을 때 범강과 장달은 장비에게 가혹행위를 당하다 분노가 폭발해 그를 죽인 것으로 짐작되지만 구체적인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장비를 죽인 정확한 이유는 알 수가 없다고 하네요
장비는 개인의 무력은 물론이고 병사들을 지휘하는 능력이나 전술 전략을 짜는 능력까지 모두 최상급으로 평가받는 촉나라 최고의 장수로 삼국지 시대에 수많은 뛰어난 장수들이 많았음에도 관우와 함께 독보적인 명성을 날리던 무장으로 취급받았다고 하죠
다만 다른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촉나라의 장군들에 대한 기록이 부실한 편이기 때문에 그에 관한 기록이 매우 적은 부분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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