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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조인. 삼국지연의에서 엄청 평가절하 되었지만 실제 정사 삼국지에선 조조가 가장 신뢰한 위나라의 명장

by 사탐과탐 2023.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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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은 삼국지연의에서 평가절하된 대표적인 위나라 장수입니다
실제로는 조조가 신뢰했던 명장으로 엄청난 공을 세웠던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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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삼국시대 위나라 최고의 장수 중 하나이자 조조의 인척 중 최고의 군사적 재능을 가졌다고 평가받으면서 조조가 가장 신뢰했던 장수라고 알려진 조인입니다 

 

하후돈과 하후연, 조홍 등은 조조의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가진 능력보다는 조금 더 높은 지위에 오른 것처럼 보이는 것에 비해서 조인은 조조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대들보 같은 존재로 위나라에서도 그야말로 독보적인 위용을 자랑했다고 하죠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인을 그냥 악당 조조 밑에 붙은 부하 1 수준으로 묘사해 놨기 때문에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 그저 그런 장수라고 인식됐던 비운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조인은 조조의 사촌 동생으로 어렸을 적부터 활쏘기, 말타기 등을 좋아했고 성장한 이후에는 각지에서 제후들이 세력을 일으키자 은밀히 천여 명이 넘는 소년들을 끌어모아 조조를 찾아갑니다 

이후 조인은 조조와 함께한 크고 작은 전투에는 거의 대부분 참전했는데 서주에서는 도겸과의 전투, 복양에서는 여포와의 전투등에 참전해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계속해서 공을 세워나갔죠

 

그런 조인의 능력을 높이 산 조조는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조인에게 기병들을 맡겨 군의 선봉에 내세웠고 조인 또한 어김없이 조조의 믿음에 보답했다고 합니다

이후 조조가 허도로 수도를 이전해 온 후 조인에게도 광양태수 자리가 주어졌지만 조인의 용맹함을 아깝게 생각한 조조는 태수자리에 그를 묶어두기보다는 병사들을 내주면서 전장으로 보낼 때가 많았고 그는 당시 조조군을 이끌던 최고의 장수였던 우금, 악진과 함께 조조가 일으킨 수많은 정벌전을 성공시켰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조조가 일생일대의 숙적인 원소와의 전투 관도대전을 치르고 있을 때 중원의 남쪽에 위치한 여남에서 유벽이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있었는데요

그러자 원소는 유비에게 자신의 군사를 내주면서 그를 유벽과 함께 싸우도록 시켜 조조군의 후방을 괴롭히려 했고 원소의 명을 받은 유비가 여러 현을 돌며 백성들을 선동하기 시작하자 날이 갈수록 조조의 근심은 커져만 갔습니다

 

이때 조인이 찾아와 유비가 원소의 군사들을 맡은 지 오래되지 않아 그들을 제대로 통솔할 수 없을 것이니 지금 공격해야 한다며 조조를 설득했고 조조도 조인의 말을 옳게 여기고는 조인에게 기병을 줘서 유비를 공격하도록 명령했죠

조인은 이 전투에서 보란 듯이 유비에게 승리를 거뒀는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유비가 직접 군을 이끌고 참전한 전투에서 조조 본인이 아닌 조조의 부하들에게 진 것은 조인이 유일하다고 하네요

 

한마디로 조인을 제외한 위나라의 모든 장군들은 직접 군을 지휘했을 때 유비를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이니 한편으로는 연의에서 인덕 하나로 먹고사는듯했던 유비가 실제로는 엄청난 군사적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인이 그런 유비를 이길 정도로 뛰어났다는 것 또한 놀랍죠

유비를 물리친 조인은 원소와의 전투에도 참전해서 별동대들을 계속해서 잡아내고 군량을 불태우는 등의 공을 세웠고 이후 하북을 평정한 뒤에도 고간의 모반을 잠재우고 형주지역의 강릉을 점령하는 등의 공을 세웠습니다

 

하나의 전투에서 세운 공만 해도 다른 장수라면 일생일대의 커리어에 들어갈만한 정도였는데 조인은 그런 승리를 밥먹듯이 계속해나갔다고 합니다

적벽대전에서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에 조조군이 대패하면서 조조는 자칫하면 많은 땅을 잃고 북쪽으로 크게 밀릴 위기에 처하게 되죠

때문에 가장 신뢰하는 조인에게 강릉의 수비를 맡겼고 머지않아 조인은 주유의 수만 군사와 붙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상황이 불리하다는 걸 알았던 조인은 섣불리 공격하지 말 것을 명령했지만 우금은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채 3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오히려 밖으로 나가 싸움을 걸어버렸죠

수만의 병사를 고작 300명으로 공격했으니 머지않아 우금의 부대는 당연히 전멸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차마 아군이 전멸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조인은 부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문을 뛰쳐나가 먼저 한 번의 돌진으로 우금을 구해낸 뒤 아직 적진에 남은 병사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또 한 번 적진에 돌격해 나머지 병사들을 모두 구해냈고그 모습에 기가 질린 주유의 병사들은 후퇴를 하게 되죠

 

잠시 후 위풍당당하게 돌아온 조인을 본 진교는 그를 향해 "장군께서는 실로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십니다"라며 극찬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위기에 처한 부하들을 구해낸 조인의 모습을 본 조조의 군사들은 감동해서 크게 사기가 올랐고 덕분에 조인은 이후 1년이 넘는 시간 동안을 버텨내면서 손권 유비 연합군을 상대로 형주만을 내주는 정도에서 그치며 조조가 볼 손해를 최소한으로 막아내는 공을 세웠죠

 

이후 관서지역에서는 마초를 토벌하고 동오지역에서는 유수구전투를 치르는 등 조인은 그저 한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전국적으로 불려 다니며 활동할 만큼 조조가 가장 믿는 장수였습니다

그러던 218년 한중에서 벌어진 유비와 조조의 싸움에서 유비가 대승을 거두면서 한중을 차지한 가운데 형주에 있던 관우는 계속해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위나라와 오나라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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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오나라에서는 친유비 세력이었던 노숙이 사망하고 그의 자리를 여몽이 이어받았는데 여몽은 전임자인 노숙과 달리 위나라가 아닌 촉나라의 영토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조인 또한 형주 번성에 있으면서 관우를 토벌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이 시기에 완성에 있던 후음이 관우와 연합해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조인은 후음을 토벌하기 위해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었고 기회를 엿보던 관우는 위나라의 영토로 진군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북진하기 시작한 관우는 양양과 번성을 노리며 올라갔고 이에 조조는 우금에게 최정예 7군을 주어 형주를 지원하도록 하고 서황까지 완성에 대기시키는 등 최대한의 대비를 갖추고 있었죠

하지만 관우는 얼마 후 벌어진 위나라의 지원군과의 전투에서 수공을 써서 우금이 이끄는 위군 7군을 전멸시키고 지원군을 이끌던 방덕과 우금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제 형주에 남은 위나라 장수는 양양을 지키고 있던 여상과 번성을 지키고 있는 조인, 만총이 유일했고 지원군 마저 전멸당한 상황에서 위군의 사기는 바닥을 치고 있었죠

그 패배의 충격이 얼마나 컸냐면 조조가 관우를 피해 당시 수도였던 허창을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고 하네요

 

때문에 만약 조인이 지키고 있는 번성마저 뚫려버린다면 나라의 존재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었기에 그야말로 조인과 만총이 있던 번성은 이제 위나라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을 정도의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하지만 관우의 수공으로 인해 홍수가 나버린 번성의 상황은 좋지 못했죠

거기에 지원을 왔던 병사들까지 모두 관우에게 패배했기 때문에 당시 번성에 있던 군사들의 사기는 뚝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군량까지 바닥을 보이면서 많은 부하들이 번성을 버리고 달아나자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지만 만총은 무슨 일이 있어도 번성을 지켜야 한다며 조인을 설득했죠

조인 또한 이런 만총의 의견에 동의했기 때문에 부하장수들을 모아 결사의 각오로 저항하며 번성을 지켜냈고 덕분에 조조는 패배로 인해 휘청거리던 나라를 수습할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다 마침내 서황이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하자 밖에서는 서황이, 안에서는 조인, 만총이 이끄는 군사들이 힘을 합쳐서 마침내 관우의 포위망을 뚫어내는 동시에 뒤에서는 오나라 여몽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결과적으로 관우는 죽음을 맞게 됐으며 유비는 형주를 잃게 되죠

게다가 관우의 죽음으로 유비가 오나라를 공격하게 되면서 촉나라와 오나라는 서로가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되었고 덕분에 위나라는 다시 힘을 기를 귀중한 시간을 벌게 됩니다

이 모두가 바로 조인이 지키던 번성에서 시작된 나비효과였죠

 

조조가 죽고, 조비가 왕위에 오른 후 형주와 양주 일대 등을 책임지는 도독이 된 조인은 이상하게 그때부터는 이전과 같은 활약을 보이지 못했으며 222년 벌어진 오나라와의 유수구 전투에서는 나이 어린 장수였던 주환을 상대로 훨씬 더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패배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조인은 일평생을 육지의 전투만 했던 탓에 강에서 치르는 전투의 경험이 없던 것이 패배의 원인이었을까요

그리고 다음 해인 223년 조인은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정리해 보자면 조인은 조조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명장으로 초기에는 우금, 악진과 함께 조조군을 먹여 살린 3톱으로 활약했으며 관도대전 이후 활약상이 줄어든 우금, 악진과 달리 조인은 그 후로도 꾸준하게 조조군 내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면서 전쟁터에서 세운 공으로는 그와 비교할만한 장수가 아예 없을 정도였으며 당대 조조군 내에서의 평가도 최고였다고 하는데요

 

게다가 앞에서 잠시 말했듯 조조의 부하 장수들 중 단독으로 유비를 상대해서 승리한 것은 조인이 유일한데 연의와 달리 정사의 유비는 당대 최고의 지휘관중 한 명이었다고 하니 조인의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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