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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사마천. 극심한 치욕을 버텨내고 세계 최고의 역사서를 만들어낸 인물

by 사탐과탐 202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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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치욕을 버텨내고 만들어낸 세계 최고의 역사서 사기를 지은 인물 사마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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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부터 선조들은 역사를 기록해 오고 있었는데요

과거 역사라는 개념은 역(歷)이라는 한자로만 표기했었다고 하죠

하지만 오늘 이야기할 이 인물 이후로 '역사(歷史)'라는 단어가 탄생했다고 합니다

 

역사라는 학문을 정립한 사람이라 평가받은 이 인물은 바로 전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서 중 하나인 <사기> 를 지은 사마천 입니다

그는 하루에 9번씩 창자가 뒤틀리는 고통을 이겨내고 위대한 역사서 <사기>를 만든 인물이자 동양 역사학의 시조로 평가받는 대업을 이루어낸 인물인데요

 

사마천에게는 과연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한나라에서 태어났죠

이 사마 집안은 주나라 때부터 대대로 역사가 집안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도 천문과 달력, 역법, 그리고 기록을 처리하던 관청의 장관이던 태사령 이었죠

 

역사가 집안에서 태어나서 그런지 사마천은 관직으로 나가기 전인 20살때부터 오랜기간 중국 여기저기를 여행하면서 수많은 유적이나 사적지를 다녔고 그곳 주민들에게 과거 이야기 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전해 듣는것을 즐겼으며 그 외에도 이나라 저나라를 돌아다니며 공부와 수많은 이야기들을 수집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그가 35살이던 기원전 110년 한무제는 엄청난 돈을 들여 태산에서 한 황실의 봉선의식을 하게 되었죠

 

이 봉선의식은 황제들이 하늘에 지내던 제사였는데 황제의 신임이 두터워 선택받은 신하들만이 겨우 참석할수 있었던 행사였습니다

이 위대하고 역사적인 의식의 현장에 자신도 참석할수 있을거라 한껏 기대를 하고 있었던 사마담이었지만 결국 참석을 하지 못했고 태산 아래에서 황제가 올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사마담은 실망이 너무 컸던 나머지 병을 얻게 되었고 아들 사마천에게 "천하의 역사를 기록해라" 라는 유언을 남긴채 3년만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마천은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아 태사령이 되었고 금궤석실에 있던 여러 사서들과 고사, 그외에 책들을 섭렵했으며 이때 수많은 자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하기 시작했죠

(금궤석실 : 국가의 중요한 문서나 도서를 보관하던 곳)

 

그러던 중 한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흉노를 개박살 내던 대장군 위청과 곽거병이 세상을 떠나고나서 한무제의 신임을 받던 장군은 바로 이광리 라는 인물이었죠

한무제는 기원전 99년 이광리에게 3만의 기병을 주고 흉노의 우현왕을 공격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이때 이광리와 함께 출진한 이릉이라는 인물은 보병 5천을 가지고 진격하던 중 흉노 선우가 이끄는 최정예 기병 8만명과 맞딱드리게 되었고 이때부터 흉노는 압도적인 병력을 바탕으로 이릉군을 끊임없이 공격하기 시작했죠

이에 이릉은 천천히 퇴각을 하며 그들과 맞섰는데 압도적인 병력차이에서도 꽤나 잘 버티며 심지어 반격을가해 흉노를 퇴각까지 하게 하면서 고군분투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흉노는 이릉군의 뒤에 한나라 군의 복병이라도 있을줄 알고 쫄아서 총 공격을 감행하지는 못하고 적당히 치고 빠지며 간만 보고 있었는데요

이때 이릉의 군후였던 관감이라는 인물이 교위에게 모욕을 받는일이 벌어졌고 관감은 흉노로 귀순해 이릉군 상황을 낱낱히 밀고해버리는 일이 벌어졌죠

이릉군 후미에 아무런 복병이나 지원군이 없다는걸 알아챈 흉노는 곧바로 총공격을 가했고 그렇게 이릉의 부대는 포위되고야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릉의 부하들은 일단 흉노에 거짓 항복을 한 뒤 나중에 탈출하자는 제의를 했지만 이릉은 죽음은 두렵지않다며 투항 권유를 거절했죠

하지만 압도적인 병력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투에서 패배해 결국 잡히고 말았고, 흉노에 항복하는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릉이 전투에서 패배한 이유는 한무제의 지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요

 

자신이 지원을 안해준건 생각못한채 이릉이 전투에서 패하고 흉노에 투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극대노한 한무제 앞에서 모두가 이릉을 욕하고 있을때 단 한명, 사마천 만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던 것이죠

만약 친한사이여도 황제의 눈치를 보느라 상대의 편을 들긴 힘들었을텐데 사실 사마천은 이릉과 일면식도 없는 모르는 사이 였으며 단순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을 뿐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자 한무제는 사마천이 자신에게 개긴다고 생각해 그를 옥에 가두었고 이후 사형을 선고했죠

한무제는 사마천에게 아량을 베푸는척 하면서 3가지 선택지를 줬는데요

첫번째는 그냥 사형을 당하는것, 두번째는 50만전의 벌금을 내는것, 세번째는 궁형을 당하는것 이 세가지였죠

그런데 문제는 50만전의 벌금은 현재 천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습니다

 

당시 권세가나 부자가 아니었던 사마천은 이런 어마어마한 돈을 가지고 있을리 만무했고 궁형은 바로 거세형이었죠

당시엔 사형 아니면 궁형이라는 관습이 있었는데 사형을 택하면 박수를 받으며 죽을수 있었고 장례도 성대하게 치뤄줬지만 궁형을 택한 죄인은 목숨을 구걸한 인간으로 취급받아 이후 명예를 잃고 수많은 사람들의 놀림감과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사마천은 고심끝에 결론을 내렸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도 하고 아직까지 역사서를 완성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굴욕을 감내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던 사마천은 어쩔수없이 궁형을 택한것이죠

그런데 당시 거세를 하고나서 감염이나 고열로 인해 목숨을 잃을 확률이 굉장히 높았었지만 그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궁형에 처해지고 나서 사마천은 비록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궁형을 선택했지만 무제에게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처벌 받은것이었기 때문에 지인들과 가족들은 그를 동정해 잘 돌봐주었다고 하죠

하지만 그런 내막을 모르던 당시 사람들은 비굴하게 살아남았다며 그를 엄청나게 멸시했다고 합니다

 

사마천은 몸 뿐만 아니라 마음에도 큰 상처를 받았고 이후 사람들과 가족들과도 멀리하게 되었죠

게다가 얼마나 엄청난 고통이 따랐는지 친구인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 '하루에도 장이 아홉번 뒤틀리는 고통속에 살고 있다'며 죽어버리고 싶다고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사마천은 자신의 깊은 절망과 치욕을 씻을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 역사서를 완성시키는 것이라 여겼고

그 이후 모든것을 걸고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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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신을 바짝차리고 더욱 분발해 역사서 집필에 몰두 했고 과거 자신이 대륙 여기저기를 다니며 그곳 주민들과 대화 하면서 수집했던 상세한 자료들과 그 지역의 역사를 그대로 역사서에 담기 위해 노력했으며 <열전>을 쓰기위해 수많은 책을 모으고 읽으면서 이때 사라질뻔한 역사기록들이 그대로 사마천의 역사서에 수록되거나 녹아들어 소멸되지 않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공문서나 사문서, 담화 등도 보존되어 영원히 사라질수 있었던 수많은 영웅들의 우여곡절 많았던 삶이 현재까지도 다채롭게 전해질수 있었던 것이죠

또한 사람의 전기를 쓸때 쓰던 전(傳)이라는 장르도 사마천의 태사공서 중 열전에서 비롯된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그는 기원전 90년경, 중국 역사서 중 가장 중요한 책으로 손꼽히는 <태사공서>를 완성하게 되었죠

 

이 태사공서가 훗날 이름이 바뀌어 <사기>가 된것입니다

중국에는 역대 왕조에서 공인된 정사 24개를 일컬어 '24사'라고 하는데 그 중 대부분이 나라에서 만든 역사서 이지만 한서, 삼국지, 후한서와 함께 사기는 개인이 만든 역사서 임에도 정사로 인정받고 있죠

 

사기에는 상고시대부터 한무제 까지의 중국과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하고 있는데 한사람이 이렇게 방대한 기간을 다룬 역사서를 쓴 사례는 전 세계를 통틀어 보아도 굉장히 드물기 때문에 정말 대단하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또한 사기는 24사 중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자 전 세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서 중 하나이며 24사의 으뜸으로 평가 받고 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사기는 사마천만의 독특한 방식인 '기전체' 방식으로 쓰여졌는데요

기전체는 인물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이후 중국에서 쓰여진 역사서는 이 기전체로 기록되었다고 하며 이 때문에 기전체를 정사체라고도 부르죠

 

반대로 시간의 순서대로 기록하는 방법은 편년체라고 하는데 한국의 역사서 중 삼국사기와 고려사는 기전체의 형식으로 만들어졌고 조선왕조실록은 편년체로 만들어졌지만 중간중간 다른 형식으로 쓰여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마천은 돈을 내고 처벌을 면제받지 못한것에 대한 아쉬움이 너무나도 컷던 탓인지 <화식열전> 에서는 여러 부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남긴말이 있었는데요

 

바로 돈만 많으면 고자도 되지않고 떵떵거리며 황제 부럽지 않은 삶을 살수 있으니 가급적이면 돈을 많이 버는게 좋다고 적어 놓았습니다

훗날 한무제도 자신이 한짓이 후회 되었는지 과거 사마천을 욕하고 처벌해야 한다했던 사람들을 싹다 처형시켜버리고 사마천을 불러 '남자가 그거하나 없는게 뭔 대수냐고, 어깨피고 당당하게 살아라' 며 사과아닌 사과를 했다고 하죠

 

이후 한무제는 사마천을를 중서령 자리에 앉혔는데 문제는 중서령은 당시 지위는 높았지만 주로 환관들이 맡았던 직책이었고 사마천을 중서령 자리에 앉힌건 사실상 환관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후 사마천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은데요

 

한서 사마천 열전에는 '그의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고통을 당했으니 최후가 평안하지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을 보고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또다시 한무제에게 옳은소리하다가 처형당했을 것이다 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고 만약 한무제가 처형하라고 명령을 내렸으면 사마천열전에 기록되지 않았을리 없다며 아마 그냥 무난하게 살다가 무난하게 세상을 떠났을거라는 추측도 존재하죠

 

사마천의 후손들의 말에 따르면 사마천은 죽기전 황제를 비판해 결국 처형되었고 자신들도 처형될까 두려웠던 사마천의 후손들은 성씨를 사(司)씨, 마(馬)씨로 나누거나 한자를 변형시켜 동(同)씨, 풍(馮)씨 등으로 바꾼뒤 숨어 살아 왔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담으로 거세 되어졌다는 공통점으로 인해 훗날 환관들은 사마천이 환관은 아니었지만 상징적인 의미로 사마천에게 강철장군이라는 칭호를 주었고 환관의 시조로 추앙받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왠지 사마천이 들으면 기분나빠 할수도 있을것 같네요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전세계 역사상 최고의 역사서를 만들었던 사마천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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