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흥다오는 몽골제국의 침략을 세 번이나 막아내서 세 번이나 나라를 구한 베트남의 영웅으로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과 비견되는 인물입니다
1200년대 중국을 통일했던 몽골이 세운 원나라는 세계역사상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가질 만큼 수많은 나라를 침공한 국가였습니다
금나라와 남송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왕조인 호라즘 제국 그리고 러시아 등 무수히 많은 나라들이 몽골의 막강한 군사력에 무릎을 꿇었으며 우리나라만 해도 고려시절 무려 9차례에 걸친 여몽전쟁 끝에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던 아픈 기억이 있죠
그런데 이때 베트남에서 당대 최강의 제국인 원나라의 공격을 육지와 바다를 가리지 않고 무려 세 차례나 막아내는 데 성공한 베트남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고 하는데요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쩐흥다오입니다
쩐흥다오의 본명은 쩐꾸옥뚜언(진국준)으로 쩐흥다오라는 호칭은 그의 작위인 흥다오브엉(흥도왕)에서 따온 것인데 '쩐흥다오'라는 이름은 우리나라로 치면 이순신 장군을 '이충무공'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쩐흥다오는 단순히 베트남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영국 BBC가 선정한 세계 100대 명장 중 한 사람으로 꼽혔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장수로 유명한 인물이죠
그가 13세기말 몽골군의 침략을 세 차례에 걸쳐 막아내는 데 성공하자 몽골의 동남아시아 정벌계획 자체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동남아시아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쩐흥다오는 원래 13세기 베트남을 지배했던 쩐왕조의 왕족으로 당시 베트남의 왕이었던 태종과 사촌지간이었다고 하는데요
그의 아버지가 조정 내의 권력다툼에 패배해 조정과 대립하던 시기도 있었는데 그런 그의 운명을 바꾼 것이 바로 몽골제국의 침공이었다고 합니다
1257년 몽골군 장수 우리양카다이가 당시 몽골을 상대로 끈질기게 버티던 남송을 공격하기 위해 베트남에 길을 빌려달라고 사신을 보내면서 몽골제국과 베트남의 첫 만남이 시작되었죠
당시 몽골 제국의 지도자였던 몽케는 아우 쿠빌라이를 보내 송나라의 서남쪽에 있는 대리국을 공격하게 했는데 쿠빌라이의 장수였던 우량카타이는 대리국을 제압하는 데 성공한 후 자신의 부하들을 베트남에 사신으로 보내서 우리는 송나라를 치러 갈 생각이니 쓸데없이 저항할 생각하지 말고 우리에게 항복한 뒤 송나라로 가는 길을 열라는 뜻을 전했습니다
이들의 무례한 태도에 분노한 쩐태종은 사신들을 대나무 밧줄로 묶어 가둬버렸죠
이에 우량카타이가 2만 5천의 병사를 이끌고 베트남의 수도 탕롱을 향해 진격하자 쩐태종 또한 쩐흥다오를 비롯한 여러 장수들을 데리고 출전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타오 강 전투에서 처음에는 쩐 태종이 이끄는 코끼리 부대가 몽골군에게 공격을 가했지만 우량카타이의 아들 아유가 궁병들을 데리고 와서 코끼리의 눈을 비롯해 피부가 약한 부분에 화살을 퍼붓기 시작하자 상황이 점점 불리해지기 시작하면서 베트남군은 일단 강변에서 물러나기로 했죠
이때 쩐흥다오는 부하들에게 은밀히 명령을 내려 몽골군이 식량을 얻지 못하게 그들이 오는 경로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식량을 땅에 파묻어버리라는 이른바 청야전술을 시도했다고 하는데요
몽골군은 이어진 베트남과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거두면서 쩐태종이 버리고 달아난 베트남의 수도 탕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쩐흥다오의 청야전술 때문에 가지고 온 보급품이 바닥을 드러낸 상황이었습니다
우량카타이는 병사들을 시켜 주변 마을이라도 약탈해보려 했지만 쩐흥다오가 이미 그 주변 지역에 모두 손을 써놓아서 쌀 한 톨 찾을 수 없도록 말끔하게 청소해 놓은 탓에 털어갈 게 없었다고 하죠
그렇게 9일 동안이나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몽골군이 점점 지쳐갈 때쯤 밤이 깊은 시간에 베트남군이 강을 거슬러 올라와 기습을 가했고 몽골군은 갑작스런 공격에 대패한 뒤 도망치게 됩니다
이렇게 원나라와 베트남과의 1차 전쟁은 최종적으로 베트남의 승리로 끝나게 되죠
1285년에는 쿠빌라이의 9번째 아들인 진남왕 토곤을 총사령관으로 한 50만 대군이 쳐들어온 원나라의 2차 침공이 시작되었고 베트남은 이번에도 수도인 탕롱이 순식간에 함락당해 버렸는데요
당시 황제이자 쩐태종의 손자인 인종은 상대가 워낙 막강한 데다 수도까지 내주고는 적들에게 쫓기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 항복할 마음을 먹게 됩니다
이때 쩐흥다오가 몽골군에게 쫓기던 인종과 선종을 구해낸 뒤 "항복을 하시려면 먼저 신의 목부터 베어주소서"라며 강한 의지를 보였고 쩐흥다오에 의기에 감동한 인종 또한 항전을 결심하게 됐다고 하네요
그렇게 쩐흥다오는 왕의 승인을 받아 무려 25만에 달하는 병사를 모집하게 됩니다
보통 이 정도의 대규모 병력을 거느리게 되면 자신감을 얻어 상대와 정면승부를 벌이려는 지휘관들이 많은데 당시 군마가 부족했던 베트남은 송나라와 마찬가지로 보병중심의 부대였고 이런 부대로 원나라의 기병부대와 싸우면 매우 불리해질게 뻔했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쩐흥다오는 전면전을 시도하기보다는 청야전술과 게릴라전투를 계속 시도하면서 원나라 군대를 괴롭혔죠
밀림이 많아 보병 중심의 전술을 펼치기 좋은 베트남의 이점을 제대로 살린 것입니다
원나라군 입장에서는 덥고 습한 정글에서 온갖 독충과 맹수들에 시달리는 것도 괴로운데 25만이나 되는 베트남의 병사들이 곳곳에서 게릴라 전술까지 펼쳐대니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은 상황을 겪었을 거라 짐작되죠
이후 베트남군은 풍토병과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원나라를 상대로 반격을 가했고 원나라는 베트남의 수도인 탕롱을 다시 빼앗긴 후 군사들을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시키면서 결국 두 번째 전쟁 역시 베트남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1287년 원나라가 세 번째 침공을 시도해 오자 쩐왕조도 군사들을 보내 각지에서 원나라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연달아 참패를 당하게 되죠
결국 이번에도 원나라군은 베트남의 수도인 탕롱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탕롱성을 지키고 있던 쩐흥다오는 앞으로는 평화를 이야기하면서 뒤에서는 전쟁을 준비하는 화전양면 전술을 사용해서 낮에는 원나라 진영으로 사신을 보내 계속해서 화친을 요구하다가 밤에는 몰래 별동대를 이끌고 진격해 원나라 군의 식량과 물자를 전부 불태운 뒤 퇴각하는 일을 반복했죠
그렇게 방어와 기습을 통해 원나라 군대의 발목을 오랫동안 붙잡은 쩐흥다오는 부하 장수들을 보내 황제인 쩐 인종과 태상황 쩐 성종을 무사히 피신시키기도 했습니다
탕롱 전투에서 원나라 군은 마침내 성안까지 진입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쩐흥다오가 이끄는 수비군이 끝까지 격렬하게 저항하며 수비를 계속하자 결국 완전히 성을 점령하는 데는 실패하게 되면서 탕롱에 있던 궁궐과 시내에 불을 지르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는데 만족하고 병사들을 물려 철수하게 되죠
이후 각지에 퍼져있던 원나라 군의 부대가 풍토병과 베트남군의 게릴라 전술에 시달리면서 3차 침공을 시도한 지 겨우 3개월 만에 총사령관 다곤은 베트남에서 물러날 결심을 하게 되는데요
쩐흥다오는 그들이 바익당 강을 통해 철수할 것을 예상하고는 강바닥에 말뚝을 박은 후 밀물이 가장 높게 밀려들어오는 만조 때 원의 수군을 상류로 유인하고는 물이 다시 빠져나가는 간조 때 말뚝에 걸려 움직임이 멈춰버린 원의 군선들을 상대로 총공격을 펼쳐 원나라 군대를 사실상 전멸시켜 버렸죠
비록 3차 침략까지 물리치기는 했지만 쩐 왕조의 인종은 몽골이 계속해서 침공을 해온다면 장기적으로는 베트남의 국력이 점점 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는 화친을 위해서 원나라에게 조공을 바치고 원나라 포로들을 되돌려 보내면서 원을 상국으로 받들겠다고 제안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베트남 정복의 꿈을 포기하지 않은 쿠빌라이 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4차 원정을 준비하도록 했는데 준비도중에 쿠빌라이가 사망하면서 베트남에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되지 않던 원나라는 결국 정벌을 포기하게 되었죠
이렇게 베트남은 세계 역사상 몽골 제국의 군대를 격파한 몇 안 되는 나라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당시 몽골제국은 베트남보다 더 강력했던 금나라와 호라즘 제국등을 이미 멸망시킨 당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나라였는데 이런 몽골의 침입을 베트남이 무려 세 차례나 물리친 것은 정말로 놀라운 업적이죠
쩐흥다오는 전쟁이 끝나자 그 공으로 흥도왕에 봉해졌으며 이후 인종과 영종을 보좌하다가 1300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살아서는 베트남의 수호신이었던 쩐흥다오는 죽은 후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으면서 지금까지도 베트남에서는 그를 기리는 제사가 행해지고 있으며 베트남 전쟁 시기에는 남북 가릴 것 없이 쩐흥다오의 이름을 내걸면서 자신들이 진정한 베트남의 계승자라 주장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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