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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쿠로후네 사건. 일본을 식민지로 삼으려고 나타났던 미국의 시커먼 배들

by 사탐과탐 2023.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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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식민지로 삼으려고 나타났던 미국의 시커먼 배들 쿠로후네 사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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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9월 일본의 군함인 운요호가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해안가를 정탐하는 일이 벌어졌죠

이에 조선군은 접근하지 말라고 여러번 경고했음에도 계속해서 접근하자 조선의 초지진 포대에서 포격을 가했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기다렸다는듯이 초지진을 파괴하고 강화도를 약탈했으며 이후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에게 돌렸고 개항을 요구하게 되죠

 

그렇게 조선은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면서 강제로 개항을 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보다 조금더 과거인 1800년대 중후반, 일본도 이 운요호 사건과 똑같은 일을 미국에 의해 당하게 되는데요

근데 어떻게 일본은 미국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고 근대화에 성공해 아시아의 패권국가가 될수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것은 순전히 일본이 운이 좋았다고 할수 있는데요

오늘은 일본이 미국에게 당한 운요호 사건인 쿠로후네 (흑선내항) 사건에 대해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산업혁명을 맞게된 유럽 각국은 대량생산된 공산품을 처리하기 위해 인도, 동남아, 중국 등 아시아로 시장을 확대해 나가기로 마음먹었죠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은 빠르게 치고나와 아시아 여러 국가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식민지 확장에 앞서나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는사이 미국은 점점 뒤쳐지고 있었던 것이죠

또한 산업혁명으로 유럽과 미국의 공장은 밤새 돌아가고 있었는데 이때 사용된 램프의 기름은 고래 기름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 고래기름을 얻기 위해 서구 열강들은 주로 일본 연안을 포함해 전세계 바다에서 고래를 마구 잡아들이고 있었죠

당시 국도 포경활동에 열심히였는데 장기간 항해를 위해서는 보급 거점이 필요했고 미국에서는 최적의 거점으로 일본을 생각하게 된것입니다

그렇게 미국은 1846년, 일본에 찾아가 통상을 요구했지만 조약을 맺을수는 없었고 1852년에 일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내비치던 미국의 대통령 필모어는 페리 사령관에게 불가피하다면 류큐의 점령도 불사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죠

 

페리 해군사령관이 받은 임무는 일본 연안과 인접한 섬들을 탐사 및 측량 하고 여러 정보들을 수집하면서 일본을 개항까지 시키라는 것이었는데요

그렇게 1852년 11월, 페리는 일본을 향해 출항을 개시했습니다

그리고 약 8개월만인 1853년 7월 8일, 마침내 일본 우라가(요코스카)에 도착하게 되죠

이때 페리는 일본에 위압감을 주기위해 일부러 까만연기를 마구 내뿜는 새까만 증기선 4척을 준비했고 그렇게 살벌한 모습으로 우라가 앞바다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때 일본인들은 그 배들을 흑선 (黒船, 쿠로후네)이라고 불렀고 훗날 이 사건을 일컬어 쿠로후네 사건이라고 부르게 되었죠

그렇게 우라가 앞바다에 정박한 미군함대는 지들 마음대로 에도만의 측량을 하기 시작했고 축포나 신호, 호령을 할때 쓰이는 공포탄도 수십발 발사하며 무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일본은 하급 관리를 보내 페리에게 온 목적에 대해 물었는데 페리는 통상 조약 체결을 위해 왔다는 의사를 내비치며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받을 고위 관리를 파견하라고 요청했고 만약 그러지 않을시 군사적 행동을 취할것이라며 으름장을 놓았죠

 

그리고 7월 10일, 11일 이틀동안 우라가 항구를 측량하기 까지 했는데 그들의 무지막지한 태도에 막부에서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막부 내에서는 일단 그들의 뜻을 적당히 들어주고 군함부터 내쫓은 다음 후일을 도모하자는 의견으로 좁혀졌고 어쩔수 없으니 미국 대통령의 국서는 받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죠

그렇게 막부의 명을 받은 일본 신하들은 페리를 만나게 되었는데요

당시 12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요시는 아파서 앓아누워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쇼군이 병치레 중이라서 결정을 할수가 없으니 1년만 시간을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페리는 대답을 들으러 1년후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죠

일단 페리를 돌려보내긴 했지만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페리가 떠난지 10일만에 세상을 떠나버렸고 이에사다가 다음 쇼군이 되었는데 이런 난국을 헤쳐나갈 리더가 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여러 중신들도 딱히 좋은 묘안이 없다보니 개항 문제에 대해서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막부의 권위만 계속 떨어지고 있었죠

 

그런데 약속과는 다르게 페리는 1854년 2월에 갑자기 우라가에 나타나 결단을 강요하고 나섰습니다

페리는 홍콩에 머물면서 일본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가 쇼군인 이에요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의 국정이 혼란스러운 틈을타 순식간에 통상 조약을 맺어버릴 생각이었던 것이죠

어쨌든 갑자기 나타난 페리가 막무가내로 개항을 요구하자 막부는 굉장히 초조해 졌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 다시 시간을 끌려는 일본의 모습에 열받은 페리는 일본을 초토화 시키겠다며 화를 내자 깜짝 놀란 막부는 요코하마를 협상 장소로 정하고 약 1개월간의 협상 끝에 미국의 개항 요구를 받아들였죠

당시 일본 막부에서는 개항할수 밖에 없는 여러 이유가 있었는데요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뒤를 이은 이에사다가 너무 병약해서 후계자도 없었고 정사에도 관심이 없었던 것이죠

 

결국 막부는 이에사다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세력이 둘로 나눠져버렸습니다

두 세력의 대립이 점점 격화되자 막부는 내부문제를 단속하기 위해 외부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했고 그것이 그대로 개항으로 이어진것이죠

거기다가 당시 페리 함대는 에도만으로 진입해 입구를 막고 있었는데 에도에서 사용되는 물자들 대부분이 이 바닷길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개항을 하지 않고는 버틸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막부 내에서는 미국과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제국이던 청나라가 서양국가들에 의해 개박살 나버렸다는 소식을 네덜란드를 통해 이미 다 들었던 상태라서 애초에 저항할 수가 없다고 판단해 결국 미국이 제안한 대부분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결정했으며 그렇게 1854년 3월 31일, 미일 화친 조약(가나가와 조약)을 맺게 된것이죠

이로써 약 250년간 이어진 일본의 쇄국정책은 결국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년후인 1858년 7월에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 조약은 일본측에 굉장히 불평등하게 맺어진 조약이었던 것이죠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을 보면 무역에 대해서는 일본 관원들이 간섭을 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미국 물품에 대해 20%정도의 관세율을 정했지만 정작 중요한 쌀과 생사 등 일본의 주요 산업품에는 고작 5%의 관세만을 물릴 수 있었습니다(생사 :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실)

뿐만아니라 치외법권이 인정되어 미국인이 일본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일본은 처벌하지 못했던 반면 일본인이 미국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미국법에 따라 처벌받았죠

 

거기다가 최혜국 대우를 받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본이 만약 다른 나라와 조약을 체결할때 미국과의 조약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체결했을 경우에 미국도 그 혜택과 조건 등이 자동으로 체결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미국만 해당할뿐 일본은 미국에게 최혜국 대우를 받지 못했죠

그리고 일본은 이후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이와 동등한 수준의 불평등한 조약들이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런 불평등 조약과 개항이 일본사회에 미친 영향은 굉장했는데요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나서 막대한 양의 금이 유출되어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해 일본 서민들은 경제파탄을 맞게 되면서 여기저기서 농민반란이 일어났죠

동시에 에도 막부의 권위가 엄청나게 실추되었으며 존황양이를 내세운 조슈번과 사쓰마번 등이 에도막부와 대립하게 되었고 이는 훗날 막부를 무너뜨리자는 도막 운동으로까지 번지게 됩니다 (존황양이 : 천황을 다시 옹립하고 외세를 몰아내자)

 

그런데 이때 미국은 뭘하고 있었을까요?

미국은 다른 서구 열강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도 일본을 비롯한 여러 아시아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 계획 이었죠

그리고 결국 힘으로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밀어부쳤고 이제 점점 일본의 이권을 하나하나 빼앗으며 식민지로 만들면 끝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쿠로후네 사건이 벌어지고 8년후인 1861년,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이 터지면서 더이상 일본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어지고 말았죠

 

본인들 먹고살기에도 급급해진 미국의 개입과 간섭이 사라지자 일본은 나라를 개혁하고 근대화 할수있는 엄청난 기회를 얻게 된것입니다

일본입장에서는 엄청난 행운이었던 셈이죠

이후 1867년 천황에게 권력을 되돌린 대정봉환이 일어났고 천황파(도막파)와 막부파의 전쟁인 무진전쟁에서 천황파가 승리하면서 메이지 유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일본은 대 개혁과 근대화를 달성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이후 일본은 미국이 했던 짓(운요호사건-강화도조약)을 그대로 조선에게 하면서 그렇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죠

일본이 미국의 식민지가 될뻔했지만 운좋게 나라를 개혁하고 근대화 할수 있는 단초가 된 사건 쿠로후네 (흑선내항) 사건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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