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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천안문 항쟁. 중국이 민주주의 국가가 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

by 사탐과탐 2022.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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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대의 민주화 운동이었던 천안문 항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89년 6월의 어느 날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한 남성이 양손에 쇼핑백을 든 채 줄지어 오는 탱크들을 맨몸으로 막아섭니다

길이 막힌 탱크는 방향을 틀어 그 사람을 피해가려고 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목숨 걸고 탱크가 앞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았죠

 

자칫 잘못하면 자신의 목숨이 날아갈 뻔한 위험한 상황 속에서 그 남자가 필사적으로 탱크를 막아야만 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화궈펑이 그의 뒤를 이었지만 화궈펑은 마오쩌둥이 싸질러놓은 희대의 뻘짓인 문화대혁명의 뒷수습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2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은 덩샤오핑이 권력을 잡게 되죠

 

덩샤오핑은 마오쩌둥 시대의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폭망한 중국의 경제를 다시 살리기 위해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노리는 '개혁개방'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자본주의를 도입하면서 많은 권한을 쥐게 된 하급 관료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르기 시작한데다 혈연과 지연 등의 인맥을 중시하는 꽌시 문화까지 유행하면서 오히려 잘 사는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의 격차가 더 심해지기 시작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게다가 그동안 마오쩌둥의 철권통치에 억눌려있던 사회 분위기가 이 시절에 상대적으로 잠깐 느슨해졌는데 그 틈을 타서 범죄율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덩샤오핑은 다시 칼을 빼들었죠

1983년부터 중국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덩샤오핑 때문에 당시 웬만한 범죄는 모조리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이 기간 동안 처형당한 사람의 수만 1년에 무려 20,000명이나 됐다는 설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치를 취했음에도 단순한 범죄자들만 처벌을 받았을 뿐 부정부패를 저지르던 당간부들과 유력자들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면서 오히려 가진 자들은 처벌받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만 처벌받는다는 인식만 심해졌죠

비록 대놓고 불만은 표시하지는 못했지만 공산당에 대한 불만은 중국인들의 마음속에서 계속 커져가고 갔는데요

 

여기에 개혁개방으로 서서히 들어오는 외국의 문물을 보고 각성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중국의 학생과 시민들은 공산당을 향해 사회 여러 분야에 대한 민주화와 부정부패 척결을 주장하며 활발한 학생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당시 공산당의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은 사람들의 이러한 민주화 요구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시민들의 시위를 적극적으로 진압하지 않았죠

 

게다가 후야오방은 이전부터 당의 고위 간부들과 친인척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것을 막으려는 시도를 해왔기 때문에 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다른 공산당 간부들의 압박을 받고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2년 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를 일으키며 사망하게 되는데요

후야오방의 죽음을 계기로 베이징을 중심으로 해서 각지의 학생들이 민주화와 자유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게 됩니다

 

그 모습에 자극받은 각계각층의 시민들이 참여하고 마침내 전국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이 합류하면서 천안문 광장에는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리게 되었죠

이렇게 해서 중국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는 천안문 6.4 항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항쟁이 시작된 4월 17일 중국의 학생들과 시민들은 후야오방을 추모하기 위해 인민영웅기념비로 몰려들기 시작했으며 수백 명의 대학생들과 시민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만들어졌죠

그들은 스스로 만든 화환을 든 채 진혼곡을 부르면서 천안문 광장까지 행진했는데 그중에는 후야오방의 집에 문상을 가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후 후야오방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난 후부터 시위가 벌어지는 지역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는데요

하지만 덩샤오핑은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을 오히려 폭도 취급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전해 들은 시위대는 크게 분노했고 이때까지만 해도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시위 분위기도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5월 15일에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중국을 방문했는데 천안문 광장이 시위대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는 제대로 된 환영행사를 받지도 못한 채 뒷길로 돌아서 자신의 숙소로 가야만 했던 사건이 발생했죠

이후 이어진 중국정부와의 회담 자리에서도 곳곳에서 시위대가 내는 소리가 들리는 등 중국 지도자들로서는 대단히 창피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좋지 못했던 소련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소련의 서기장이 직접 방문한 상황에서 제대로 망신을 당한 중국 공산당은 크게 분노하며 시위대를 응징하기로 결정했죠

그렇게 5월 18일 베이징 일부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군통수권을 쥐고 있던 덩샤오핑은 비무장 상태인 시민들을 상대로 병사들을 출동시키는 명령서에 사인했죠

 

오직 쉬친셴이라는 장군만이 "인민해방군은 인민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라며 출동을 거부했는데요

이후 쉬친셴은 장군의 자리를 잃게 됐으며 이후로도 온갖 불이익을 다 당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건 20여 년 후 홍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그때의 결정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다시 그때로 되돌아가도 그렇게 하겠다. 차라리 죽음을 당할지언정 역사의 죄인은 되지 않겠다."라고 대답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죠

 

5월 20일 중국 공산당이 본격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하며 5만 명의 대군을 베이징에 투입했지만 예상외로 시민들과 학생들의 저항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섣불리 들어가지 못하고 주변에서 포위만을 하게 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천안문 광장에서 시위를 하던 학생이 탈진해 쓰러지면 군의관이 그들을 돌보거나 군차량으로 병원에 후송시켜주기도 했고 시민들이 병사들에게 물과 음식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등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하죠

때문에 중국 공산당도 바로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계속 사람들에게 천안문 광장을 비울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공산당 내부와 시위대 내부 양쪽 진영에서 좀 더 강하게 대응할 것을 주장하는 세력이 힘을 얻기 시작하면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운명의 6월 3일 밤 중국 공산당은 마침내 병사들에게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죠

 

밤 10시에 베이징으로 진입한 군인들은 처음에는 비무장 상태로 시민들에게 해산을 요구했다가 별 효과를 보지 못하자 이번에는 곤봉을 든 채 접근했지만 시민들의 강한 저항을 받고 후퇴하게 됩니다

결국에는 기관총과 소총을 들고 비무장 상태인 시위대를 향해 쏘기 시작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군인들 뒤로는 탱크와 장갑차가 줄줄이 따라왔는데 장갑차 위에 탄 군인은 사람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하늘에 대고 총을 쏘다가도 시민들이 보이면 바로 총구를 시민 쪽으로 돌려서 아무 거부감 없이 그들을 쏴 죽였다고 하죠

그리고 잔인하게도 도망가는 시민들까지 탱크를 몰고 가서 짓밟아 죽였다고 합니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시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집에서 쉬고 있던 시민들도 이들의 손에 죽음을 맞았다는 것이죠

 

흥분한 군인들이 일반 가정집에도 마구 총을 난사하면서 벌어진 비극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외국인 전용 거주구역에까지 총을 난사했다고 하네요

격분한 시민들은 버스나 택시 등을 이용해서 전차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돌과 화염병을 던져 전차와 장갑차를 폭파시키고 전차병을 끌어냈습니다

 

얼마 후 거리는 덩샤오핑을 학살자라 부르짖으며 시민들을 학살하는 공산당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로 가득 찼죠

기어이 시민들의 저항을 뚫고 천안문 광장에 들어가는데 성공한 계엄군은 그때까지 광장을 지키고 있던 시위대의 지도층을 향해 이대로 해산하지 않고 시위를 계속한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며 협박했고 시위대 지도부는 이후 자신들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해산하게 됩니다

 

끝까지 광장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계엄군에게 잔인하게 학살당했다고 하죠

하지만 비극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다음 날인 6월 4일부터 공산당은 전날의 약속을 어기고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했는데 거리 곳곳에서 시민들이 군인들에게 짓밟혔다고 하죠

 

이날은 베이징 전체가 마치 죽음의 도시가 된 것 같은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도로에는 자동차 대신 탱크와 장갑차가 지나다녔으며 도시 곳곳에는 불탄 사람들의 시체가 널려있었는데요

그나마도 얼마 후 인민해방군이 증거인멸을 하기 위해서 도시에 널려있던 시체를 비닐팩에 담아서 어디론가 운반해버렸습니다

 

중국 공산당 정부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파악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고 하죠

그렇게 악몽의 밤이 지나간 다음 날인 6월 5일 탱크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본격적인 진입을 시도할 때 천안문 앞 10차선 도로에서 한 남성이 맨몸으로 그 앞을 막아섰습니다

 

한참을 전차들과 대치하던 그는 얼마 후 다른 사람들에 손에 끌려나가게 됐지만 목숨을 걸고 혼자서 탱크 앞에 서서 저항하는 그의 사진은 20세기의 가장 유명한 사진 중 하나가 되었으며 중국 현대사의 상징 중 하나가 됐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중국 공산당에서는 이후에도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사건을 폭동이라고 날조한 후 전국의 학생들에게 위와 같은 시위를 벌이면 강제로 진압당할 수 있다는 점을 교육했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군사훈련과 공산주의 이론 교육까지 실시하게 되면서 더 이상 민주주의가 꽃 피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인데요

 

그 이후로도 중국 내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사람들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머지않아 공산당에서 보낸 사람들에게 끌려갔고 얼마 후 다시 사람들의 앞에 나타난 그들은 그동안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며 예전과는 다르게 공산당을 찬양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수십 년간 그런 과정이 반복되며 결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중국이 된 것이죠

지금까지 중국 최대의 민주화 운동이었던 천안문 항쟁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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