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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대의 간통 사건 탐구

초요갱. 기생 중 원탑이던 황진이보다 더 화려한 삶을 살았던 전설의 기생

by 사탐과탐 2021.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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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황진이도 단 한 번의 이름이 거론된 적 없던 조선왕조실록에도 무려 16번이나 이름을 올린 전설의 기생 초요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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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고의 기생하면 누가 떠오르시나요?

대부분이 황진이를 생각하실 것 같은데요.

황진이 이전에 전설의 기생이 한 명 있었습니다.

 

기생 중 원탑이던 그 유명한 황진이도 단 한 번의 이름이 거론된 적 없던 조선왕조실록에도 무려 16번이나 이름을 올린 기생이었죠.

그녀의 이름은 바로 초요갱입니다.

 

황진이는 양반집 남자들, 왕족, 당대 학자들 등과 관계를 맺어온 반면에 초요갱이 상대하는 남자들은 일반 왕족도 아닌 왕의 자식들이었던 왕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세종대왕의 아들들이 그녀가 좋아서 졸졸 따라다녔다는 것이죠.

게다가 세조에게도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던 참 대단한 여인이었습니다.

 

초요갱은 평범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다 어느 양반집의 첩으로 들어가게 되었죠.

하지만 어느 날 그 양반집이 역모에 연루되며 멸문을 당하면서 초요갱은 관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녀의 첫 번째 남자는 역모죄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죠.

 

보통 역모에 관련되어 망한 집안의 여인들은 노비가 되기 마련이었는데 초요갱은 특별한 능력이 있었죠.

바로 춤에 굉장히 뛰어난 재주가 있었던 덕분에 관기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얼마나 재주가 대단했냐면 나중에는 세조가 궁에서 여는 연회 때만 되면 항상 불려가서 춤을 출 정도였죠.

그래서 '초요갱'이라는 이름 또한 허리가 가늘고 춤을 잘 추어서 붙은 기명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 드라마 역적)

 

그렇게 궁에서 미모도 뛰어나고 허리 잘록한 S라인 여자가 눈앞에서 멋진 춤을 추니 아무리 왕의 아들들이라 할지라도 멍하게 바라보며 침 흘릴 수밖에 없었겠죠.

처음 그녀에게 빠져버린 왕자는 세종대왕의 일곱 번째 아들 평원대군 '이임' 이었습니다.

 

이임은 워낙 인품도 훌륭하고 총명했기 때문에 세종과 조정 대신들에게 사랑을 받는 대군이었는데 그런 그가 초요갱에게 푹 빠지게 되어 그녀를 첩으로 삼아 글도 가르쳐주고 나라에서 새로 만든 춤도 가르쳐줬으며 경제적인 것도 아낌없이 팍팍 지원해 주었죠.

심지어 그녀는 궁중 악사 박연의 수제자가 되었고 궁중악의 전수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초요갱은 기생으로써의 레벨이 엄청 올라가게 되었고 그때 배운 궁중 악무 덕분에 궐 행사에 불려가 춤을 출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 행복도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평원대군은 19세에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녀의 두 번째 남자가 사망하게 되면서 졸지에 초요갱은 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 영화 간신)

 

그런 그녀에게 접근해온 세 번째 남자가 있었으니 그는 세종의 아들 중 한 명인 화의군 '이영' 이었죠.

 

이영은 세종과 영빈 강씨의 아들로 평원대군 이임과는 이복형제 관계였습니다.

그런 그가 제수씨인 초요갱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것이죠.

 

이영은 그녀를 끈덕지게 쫓아다니며 적극적인 구애를 한 결과 초요갱과 깊은 연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수씨와 간통을 한 패륜적인 일이었고 형제가 한 여자와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왕자들끼리 말이죠.

 

이영과 초요갱은 이 사실을 비밀로 붙이고 몰래 연애질을 하기 시작했지만 이 비밀은 금방 밝혀지게 되는데요.

 

시간이 지나 단종 3년 1455년 2월 27일.

화의군 이영은 금성대군 이유의 집에서 무사들과 함께 활쏘기 경연을 하며 잔치를 벌였는데 수양대군은 이 일이 반역을 일으키기 위해 군사훈련을 하는 것이라며 모함해 화의군과 금성대군을 역모죄로 잡아들여야 한다고 단종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 영화 관상)

 

하지만 단종은 다 자신의 삼촌들이기도 했고 겉으로 확실하게 드러난 역모의 죄상이 없다며

이 일을 마무리하려고 했죠.

 

그러자 수양대군은 또다시 다른 카드를 꺼내드는데 화의군 이영이 평원대군의 첩 초요갱과 간통하였으니 처벌해야 한다고 단종을 몰아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에 화의군은 제수씨와 간통을 한 죄로 지방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초요갱은 곤장 80대의 중형을 받게 되었죠.

 

하지만 그녀는 형벌을 대속한 덕분에 곤장은 맞지도 않았고 그렇게 한양에 머물러살며 조용히 그녀에 대한 일은 끝나는 듯 싶었는데 세조 3년 시기에 또다시 초요갱으로 인한 사고가 터지게 됩니다.

 

세종 말년에 좌의정을 지냈던 신개라는 사람의 세 아들 중 막내이자 세조의 즉위를 도운 인물이었던 그녀의 네 번째 남자였던 신자형과 눈이 제대로 맞아서 같이 살게 되었죠.

신자형은 초요갱에게 완전히 푹 빠져버려서 본처를 내쫓아버리고 안방까지 그녀가 들어앉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안방마님 행세하는 초요갱에 대해 뒷담화를 까던 여종들이 신자형에게 발각되어 맞아죽기도 했죠.

 

하지만 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는데요.

신자형의 7촌 조카뻘이었던 안계담이란 사람이 초요갱을 강제로 겁탈하기 위해 눈이 뒤집혀서 밤에 다짜고짜 나타나 신자형의 안방으로 들이닥쳤는데 놀란 그녀는 땅에 나뒹굴며 혼비백산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

도망친 초요갱을 찾지 못한 안계담은 초요갱을 내놓으라고 난리 치며 신자형의 노비들을 마구 두들겨 패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죠.

 

이 사건과 함께 신자형이 본처를 내쫓은 일과 초요갱을 욕하던 여종 두 명을 때려죽인 일이

세조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신자형은 계유정난의 공신이었기 때문에 유배는 가지 않았고 직첩만 빼앗는 걸로 사건을 마무리했죠.

 

이 일로 초요갱도 멀리 유배를 보내라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이번에도 그녀의 재주를 높게 산 세조는 그녀를 유배 보내지 않았죠.

 

당시 세조가 '4대 기녀' 라고 부르는 가무에 능한 기녀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명이 초요갱이었습니다.

이 4대 기녀들은 궁에서 있던 연회에 불려가 춤을 추던 기녀였는데 특히나 세조가 재주를 아끼던 기녀들이었죠.

 

세조는 4대 기녀들을 모두 기적에서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해주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예술 실력 덕분에 천민 신분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 영화 간신)

 

그리고 가무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초요갱을 악적(樂籍)에 올려 궁에서 연회가 있을 때 불러와 궁중 악무를 추도록 했는데 이번에는 화의군 이영의 이복동생인 계양군 '이증' 이 초요갱에게 첫눈에 반해 그녀를 겁탈해버린 것이었습니다.

 

같은 아버지의 아들들이니 여자 보는 눈이 거의 비슷한 것이었을까요?

무슨 번호표 뽑아놓은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세종대왕의 아들들은 이 초요갱에게 홀딱 빠져서 순서대로 그녀와 관계를 맺고 있었죠.

 

이 일을 보고받은 세조는 당장 계양군을 불러

“소문에 듣기로 네가 초요갱과 사통한다고 하는데 사실이냐? 어디 기생이 없어서 하필 그 여자인 것인가. 어찌하여 형제끼리 서로 간음을 하는가” 라며 호통을 쳤죠.

 

계양군은 펄쩍 뛰며 "절대 아닙니다! 하늘에 맹세코 초요갱이라는 기생은 모릅니다 억울합니다"라고 하니 세조는 알겠다며 초요갱이랑 놀지 말라 하고 그를 돌려보냈죠.

하지만 계양군은 퇴궐하자마자 그 길로 초요갱에게로 달려갔습니다.

세조의 입에서 초요갱의 이름이 나오니 또 보고 싶었나 보죠.

 

심지어 그는 그녀에게 과도하게 집착했는데 변대해라는 남자가 어느 날 몰래 초요갱의 집으로 숨어들어 왔다가 계양군이 배치해둔 경호원들에게 들켜 맞아 죽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죠.

 

아무튼 그녀와 함께 색만 밝히고 허구한 날 술만 마시며 초요갱의 치마폭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던 이증은 나이 40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녀의 다섯 번째 남자 이증 또한 초요갱의 늪에 푹 빠진 나머지 일찍 요절하게 되는 결말을 맞게 되었죠.

 

하지만 이 이후로도 그녀의 삶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증이 죽고 난 이후 초요갱은 어느 권세가의 첩으로 들어가게 되었죠.

하지만 세조가 죽고 나서 예종이 왕이 된 후에 남이를 비롯한 세조의 측근 세력에 대한 대규모 탄압이 시작되었는데 초요갱이 어떤 권세가의 첩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때 또다시 역모에 연루가 되어 다시 기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제일 처음 어느 양반가의 첩이 되었을 때도 역모에 연루가 되어 기생이 되었는데 또다시 역모에 연루되어 기생이 되어버린 것이죠.

이제는 자신을 아끼던 세조도 죽고 없으니 궁에서도 불러주질 않았기에 그녀는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종 1년 7월 17일.

평양부의 관비인 대비라는 여자가 사헌부에 신고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평안도 도사라는 벼슬의 임맹지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임맹지와 초요갱이 간통을 했다는 신고였죠.

 

하지만 이때는 세조의 국상 중이었기 때문에 고위 관리의 이 같은 행위는 국법을 어기는 중죄였습니다.

하지만 예종은 초요갱이 임맹지의 방에 들어갔다고 해서 동침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며 처벌을 하지는 않았죠.

 

그녀가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이일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후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없죠.

왠지 하도 남자에 치여서 살았으니 좀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살다 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초요갱이 관계했던 여러 남자들은 모두 결말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초요갱은 횡액(橫厄)을 가져다주는 요부'라며 손가락질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그녀의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는 부분인데 모두 지들이 좋다며 구애하고 접근했지 초요갱이 무언가 나쁜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쉽게 남자들이 꼬일 정도로 예쁜게 죄라면 죄였겠네요.

 

그리고 권력가 남자들의 초요갱 쟁탈전 중간에 끼어서 온갖 거친 풍파를 다 거치며 살아온 그녀는 어찌 보면 피해자 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는 일국의 왕이었던 세조가 4대 기녀라고 부를 정도였고 궁에서 연회가 있을 때 기생인 초요갱을 불렀을 정도면 시대를 잘못 태어난 불운한 여인이 아닌가 싶네요.

지금 초요갱같은 사람이 있었으면 전 세계를 아우르는 대스타가 되었을지도 모르죠.

 

조선시대에 태어나 두 번씩이나 역모죄로 망한 집의 첩으로 살았고 순번표 받아 가며 초요갱을 원하던 왕자들과 권세가들의 여인으로 살기도 했으며 기구한 팔자를 타고난 여인이자 기생의 전설이 된 초요갱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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