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희대의 간통 사건 탐구

김씨부인. 조선 초 왕들의 골치를 썩였던 희대의 불륜녀이자 최강의 간통녀

by 사탐과탐 2021. 7. 8.
반응형
조선 초기 태종과 세종은 허구한 날 올라오는 김씨부인에 대한 상소 때문에 골머리를 썩였는데요.
김씨부인이 온갖 불륜을 저지른다는 상소였지만 남편이 고위급 관료이다 보니 처벌하기가 애매했기 때문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김씨부인은 조선 초 참찬문하부사를 지낸 김주의 딸이었으며 혼기가 차자 조화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하지만 남편 조화는 알고 보니 평소 행실이 개판인 인물이었죠.

다른 여인네들과 바람도 시도 때도 없이 피워댔고 집에 여러 첩들을 거느렸습니다.

김씨는 남편의 이런 행각을 이를 갈며 참고만 있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 영화 방자전

 

하지만 김씨의 인내심이 '뚝'하고 끊어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남편 조화가 김씨의 어머니와 간통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죠.

이에 김씨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맞불 작전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도 허해라는 남자와 간통하기 시작한 것이죠.

 

어느 날 남편 조화가 첩을 데리고 나가 외박을 했는데 김씨도 곧장 허해를 집으로 불러들여 뜨밤을 보내게 되었죠.

그런데 허해가 김씨의 집에서 옷을 벗어놓을 때 남편 조화의 옷걸이에 걸어놓았다가 뜨밤을 보낸 후 돌아갈 때 실수로 조화의 옷을 입고 가버렸습니다.

 

그 후 조화가 새벽에 안방에 들어와서 옷을 꺼내 입었는데 옷이 자신의 몸에 맞지 않아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신의 옷이 아니었죠.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이므로 조화는 김씨를 다그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김씨는 이런 사태가 발생했는데 조금의 당황해하는 기색 없이 "오늘 밤에 허해가 와서 하루 자고 갔는데 잘못 입고 갔나보죠." 라고 했죠.

 

그러자 남편 조화는 개빡쳐서 김씨에게 뭐라 하며 소리쳤는데 김씨는 "당신의 하는 짓이 이와 같은데 어찌 나를 허물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먼저 수레에 오른 뒤라야 나도 다음 수레에 오릅니다." 라며 당당히 남편에게 맞섰습니다.

그러자 할 말이 없어진 조화는 분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침을 뱉어버리고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 영화 방자전

 

그 이후부터 김씨는 더욱더 거리낌이 없어졌습니다.

그녀는 박송이라는 가노와도 간통하였는데 남편 조화에게 또 걸리게 되었고 또다시 훈계를 들었지만 소귀의 경 읽기였죠.

 

그러던 중 김씨가 병으로 드러눕게 되었습니다.

병에 차도가 없자 무당을 불러 굿을 했는데 가노였던 박송이 무당에게 "다른 귀신이 붙은 게 아니라 나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라고 했죠.

이 말을 들은 근처에 있던 여자들은 모두 귀를 가리고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끝 모르던 김씨의 불륜 행각은 더욱더 활발해졌는데 여러 권세가들의 부인들과 밤마다 자주 모여 계모임 비스무리한걸 하면서 권세가 부인들의 같은 일족 남자들과 추한 소문이 나돌아 조정에서 탄핵당하기도 했고 궁내에서 일을 하는 궁인들과 친해져 궁내의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듣고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니다 발각되어 귀양을 가기도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 영화 방자전

 

그러던 중 남편 조화가 죽게 되었고 김씨는 다른 남편감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태종 15년인 1415년 영돈녕부사 이지와 재혼을 하게 되었죠.

이지는 태조 이성계의 사촌동생인 인물이었는데요.

고려 말에는 이성계와 함께 왜구도 때려잡고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할 때도 그 현장에서 이성계를 돕던 이지는 세종대왕 대에는 왕가 종친 중 가장 높은 직급에 있던 사람이기도 했죠.

 

재혼 당시에 김씨의 나이는 57세, 이지의 나이는 67세였는데 김씨는 나이 들어서 재혼하는 것이 쪽팔리기도 해서 주위에 알리고 있지 않다가 재혼하는 당일 자신의 자식들에게 재혼 사실을 알렸다고 하죠.

 

하지만 왕실 종친인 이지가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니던 김씨와 재혼한다는 소리에 사헌부에서는 태종에게 수많은 탄핵 상소를 올렸지만 태종은 "아내 없는 남자와 남편 없는 여자가 재혼한다는데 우리가 어쩌겠냐" 라고 하며 그냥 넘겼다고 합니다.

 

그렇게 재혼 첫날밤이 지나고 김씨가 일어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 분이 늙었는가 싶었는데, 하나도 늙지 않은 것을 알았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밤새 무슨 큰일이 있긴 있었나 보네요.

 

이지는 효심이 지극한 인물이었는데요.

어머니의 기일은 음력 12월 31일이었고, 아버지 기일은 음력 1월 1일이었기 때문에 항상 연말부터 연초까지는 향림사라는 절에 가서 휴양도 하고 제사도 지내고 했었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지는 김씨와 함께 제사를 지내러 가는 겸 연말에 바람 쐬러 여행도 하는 겸 향림사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향림사에서 며칠간 머무르며 부모님 제사도 지내고 하다가 1월 3일 밤. 절의 구석진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지는 천천히 다가가 그 방문을 확 열어젖혔는데 왠 중과 자신의 아내인 김씨가 둘이 어우러져 뒹굴고 있는 걸 목격하게 되었죠.

이에 완전 열받은 이지는 중과 김씨를 꾸짖으며 두들겨 패기 시작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 영화 방자전

 

당황해서 눈 돌아간 김씨는 이지의 뽕알을 붙잡고 늘어졌는데 그만 뚜둑! 하고 뜯어져버린 것입니다.

이에 이지는 충격에 쓰러지고 말았고 결국 사망하게 되었죠.

 

이때 이 장면을 수많은 사람들이 목격했지만 마침 그때 그 장면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모두 김씨의 노비들이었기 때문에 이일에 대해서 입을 닫아버렸죠.

 

목격자들이 모두 입에 지퍼 잠그고 모른척하자 이지가 죽은 이유는 79세의 나이니 그냥 수명이 다 되어서 자연사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죽은 이지의 전처에게서 태어난 큰아들인 이상흥이 충청도에 있다가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달려왔습니다.

 

김씨는 이때 남편 이지가 외지에서 급사해버렸으니 너무나 슬픈 나머지 정신이 나간 척과 넋을 잃은 바보처럼 보이게 연기했고 이에 진술도 못할 정도로 맛탱이가 간척했으며 계속 묵비권을 행사했으니 결국엔 이 뽕알 살인 사건은 잠잠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잘 전달되는 특성이 있죠.

여러 사람이 이 상황을 알게 되었고 사건 장소인 향림사가 있던 마을 사람들이 “관청에 알려서 시체를 검사하면 원통함을 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이지의 아들 이상흥에게 슬쩍 귀띔을 해줬는데 첫째 아들인 이상흥은 관청에 조사 요청을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이유는 아마도 아버지는 새어머니에게 뽕알이 뜯겨 나가 죽었고 새어머니는 정신이 나가 난리를 치고 있으니 이 사실이 알려지면 지체 높은 왕가의 종친 가문에서 이 무슨 개쪽 당하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죠.

그래서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걸로 하고 모른 척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김씨는 또 하나 사고를 치고 마는데 1427년 7월에 영돈녕부사 이지의 부인에게 내리는 안락군부인의 작위를 사칭한 죄로 세종에게 보고가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김씨의 과거 행적들을 들은 세종은 그녀를 한양에서 쫓아내 버립니다.

한양 10리 밖에서는 자유롭게 살수 있지만 그 안으로는 들어올 수 없게 만들어 버렸죠.

 

그래서 김씨는 전 남편인 조화의 농장이 있던 통진현으로 가게 되었는데 김씨를 외지로 쫓아 보냈지만 처벌이 약하다고 판단한 신하들이 그녀의 아들들에 대한 처벌도 같이 하자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김씨가 이미 이지의 아내가 되어 왕실의 종친이 되었으니 죄를 주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며 김씨의 아들 중 고을의 수령을 하고 있던 조심이 엄마 때문에 쪽팔려서 고을을 잘 다스리지 못할 테니 그의 관직만 파직시키도록 명했죠.

 

하지만 지속적으로 김씨를 탄핵하는 상소가 자꾸 올라오자 결국 세종은 김씨를 강화도로 귀양을 보내 움막에서 살도록 명하는 동시에 신하들에게 더 이상 김씨에 대한 이야기를 거론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김씨는 또 한 번 파주로 귀양지가 옮겨지기도 했지만 1년 뒤인 1428년에 결국 세종의 명에 의해 사면되었죠.

 

하지만 더욱 불행한 건 김씨의 과거 문란한 행적들 때문에 김씨의 아들과 손자들, 또한 김씨 가문의 딸들과 결혼한 남자들은 세조 때까지도 중요 관직에는 오르지 못했고 승진에서 누락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초에 왕들의 골치를 썩혔던 조선 역대급 불륜녀 김씨부인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