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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조운. 어느것 하나 빠지지 않는 최강의 엄친아격 인물

by 사탐과탐 2023.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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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유비가 가장 신뢰했던 인물이자 어느것 하나 빠지지 않는 최강의 엄친아격 인물 조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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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삼국지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장수를 뽑을 때 제갈량 관우와 함께 제일 많이 언급되는 조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운은 강직하고 온화한 성품을 갖고 있으며 공과 사의 구분이 뚜렷해서 일처리가 공정했고 높은 직위와 공적에도 불구하고 늘 겸손하고 청렴한 모습을 보였죠 

 

비록 관우처럼 신으로 추앙받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사람들에게 더 친숙하게 여겨지면서 예전부터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조운을 평할 때 유비의 조아(어금니와 발톱)라는 표현을 하며 매우 높은 평가를 내렸다고 하죠 

 

그리고 조운은 위험을 무릅쓰고 주군에게 충언을 하거나 목숨을 걸고 주군의 가족을 보호하는 등 가진 능력만 뛰어난 것이 아니라 주군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한 장수였습니다 

게다가 '조운별전'에 따르면 신장이 8척에 용모도 남자답게 잘 생겼다고 하니 그야말로 모든 걸 다 가진 엄친아였다고 볼 수 있겠네요 

여담으로 조운의 별칭 중 하나인 호위장군은 곁에서 주군을 보호하고 지키는 역할의 호위무사 같은 것이 아니라 호랑이 같은 위세를 떨치는 장군이란 뜻을 가진 직위라고 합니다

 

현대에 와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짐에 따라 관우와 장비를 비롯한 여러 삼국지의 인물들이 재평가되는 와중에도 조운은 앞서 말한 것처럼 흠집을 잡을만한 부분이 거의 없는 수준이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완벽한 인물로 평가가 더 좋아지고 있다고 하죠

조운은 원래 한복이 다스리던 기주에서 말단 관리로 일했지만 원소가 한복에게서 기주를 뺏는 모습을 보고는 공손찬의 아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무렵 유비 또한 공손찬 밑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공손찬의 난폭한 성격에 기가 질려 있었던 조운은 같이 공손찬의 부하로 있던 유비를 눈여겨보게 되었죠 

유비 역시 그런 조운을 높이 평가하게 되면서 둘은 서로 깊은 친분을 맺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뒤 조운이 형의 장례를 치르러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을 때 "절대로 당신의 은덕을 잊지 않겠다"라는 말을 유비에게 남겼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말은 조운이 공손찬 밑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암시한 것으로 유비 또한 그것을 눈치챘습니다

그리고 훗날 조조에게 서주를 잃은 유비가 원소를 의지하자 조운은 유비를 찾아가 그의 부하로 들어가게 되죠

 

정사의 기록을 보면 유비가 조운과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다고 되어 있을 만큼 이때부터 관우나 장비와 동등한 대우를 받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고 합니다

201년 조운은 여남에서 패배한 유비를 따라 신야로 가게 되었고 207년 유표가 죽자 형주에서 후계문제로 내분이 일어난 틈을 타 조조가 본격적인 남방 정벌에 나서게 되는데요

이때 조운은 장판파에서 그의 생애를 통틀어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자신을 따르겠다고 나선 백성들을 거느리던 유비가 강릉으로 향하던 도중 그들을 추격하던 조조군에게 장판파에서 기습을 당하게 되며 서로가 생사를 알 수 없을 만큼 긴박한 상황이 되었는데 이때 유비의 부하중 한 사람이 조운이 조조군에 항복하기 위해 북쪽으로 떠난 거 같다는 보고를 올렸죠

하지만 유비는 크게 화를 내며 조운이 자신을 버릴 리가 없다 말했고 얼마뒤 조운은 그의 부인인 감부인과 아들 유선을 모두 구해 유비에게로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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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의에서는 이때 조운이 100만 대군을 뚫고 유선을 구해왔다고 나오지만 실제로 그가 상대한 것은 5천 명의 기병이었다고 하는데요

단순 숫자로만 보면 너무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조운의 공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때 조운이 상대했던 부대는 바로 조조의 최정예기병으로 유명한 '호표기'였죠

그런 최강의 기병 5천을 상대로 혼자 싸우면서 주군의 후계자를 무사히 구해내 돌아온 것입니다

 

물론 조운 입장에서는 유선을 구해서 피신하는 것이 최우선 목적이었으므로 무력충돌은 최대한 피하면서 돌아왔을 가능성이 높죠

침착하고 냉정한 성격의 조운이라면 호표기가 추적할 루트는 최대한 회피하면서 오직 아두를 구하는데 초점을 두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때문에 이 부분을 두고 조조군의 정예기병과 정면으로 붙어 그들을 박살내면서 돌파해 낸 것이 아니라고 실망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오히려 조운의 장수로서의 상황 판단력이 굉장히 뛰어났다고 볼 수도 있겠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게다가 조운과 호표기 5천 명 사이에 충돌이 아예 없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 처음에 감부인과 유선을 찾기 위해서 조운이 북쪽으로 홀로 돌파할 때도 유비를 찾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던 호표기와 마주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유비가 피신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조운을 본 호표기는 당연히 그를 적이라 판단했겠죠

 

때문에 부대를 나눠서 유비를 수색 중인 호표기의 소규모 부대와 유비의 가족을 찾아다니던 조운 간에는 계속해서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고 결국에는 감부인과 아두를 무사히 데려온 결과로 봐서 조운은 그 과정에 있었던 호표기 부대와의 전투 모두에서 승리하거나 호표기 본대에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성공적으로 퇴각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무려 호표기와 같은 정예부대와 전투를 치르면서도 감부인과 아두를 무사히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은 조운이 얼마나 뛰어난 무력과 판단력을 가졌는지 잘 알게 해주는 증거죠

 

위기에서 벗어난 후 조운은 아문장군이 되었는데 아문장군이란 대장기를 꽂아놓은 부대 즉 사령관이 머물고 있는 부대의 책임자로서 사령관인 유비의 직속부대를 지휘하는 역할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조운은 유비 곁에서 최측근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이후 유비는 촉으로 떠나면서 형주에 남은 손부인이 제멋대로 행동하며 자신의 집안사람들을 마음대로 휘두를 것을 걱정해 특별히 조운에게 유비 집안의 일을 맡길 정도였다고 하는데요

 

유비가 촉으로 떠날 때 형주에 남았던 사람은 조운 말고도 관우와 장비 그리고 제갈량까지 있었음에도 굳이 조운에게 그 일을 맡겼던 건 그만큼 유비가 그런 면에서 조운을 가장 믿었다는 증거라고 보입니다

그에게 조운은 자리를 비웠을 때 자신의 집안일을 맡길 수도 있었던 존재인 것이죠

이후 한중 공방전에서는 황충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황충이 적의 군량을 뺏기 위해 나간 후 오랜 시간 돌아오지 않자 상황을 보러 수십 기의 기병만 이끌고 나갔다가 갑작스럽게 조조의 대군과 마주치게 됩니다

 

병력차가 너무나도 심한 상황이었지만 조운은 침착하게 치고 빠지는 스타일의 전투를 벌이며 조조군을 당황하게 만든 후 무사히 황충을 구해내 돌아갔죠

이후 그런 조운을 잡으려고 조조군이 다시 추격해 오자 조운은 마치 그들을 맞이하는 것처럼 진지의 문을 활짝 열어둔 채 깃발을 숨기고 북을 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잠시 후 조운의 진영 앞에 도착한 조조군이 그런 촉군 진영의 모습을 보고 복병이 있지 않을까 의심해 머뭇거렸고 그 모습을 본 조운이 갑자기 북을 치고 쇠뇌를 쏘며 적군을 공격하자 혼란에 빠진 조조군은 큰 패배를 당하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다음날 아침 조운의 활약을 전해 들은 유비는 "조운의 몸은 모두 간덩어리다"라는 말을 남기며 호랑이 같은 위세를 떨치는 장군이라는 뜻의 '호위장군'이라는 별명을 지어줬습니다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이 1차 북벌을 떠나자 조운도 그를 따라 출전했는데 가정전투에서 마속이 패배하며 촉군이 뒤로 물러나게 된 상황에서 조운은 부장인 등지와 함께 촉군의 최후방을 지키며 아군의 피해를 줄이는 데 성공했죠

 

제갈량이 그런 조운의 공을 칭찬하며 그에게 상을 내리려 하자 조운은 오히려 전쟁에서 패한 장수가 상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라며 자신에게 내릴 상을 병사들에게 돌려 그들을 위로해 달라는 청을 올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제갈량은 크게 감탄하며 왜 선제(유비)께서 살아계셨을때 조운을 그토록 믿으셨는지 알겠다는 말을 남겼죠

 

이렇듯 조운은 인품까지 훌륭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장수로 관우, 장비, 위연 같은 촉나라의 손꼽히는 명장들도 그들의 인품과 성격에 흠이 있다며 정사를 지은 진수에게 크게 비판받았는데 그런 진수조차 조운과 황충만은 한고조 유방의 최측근이자 개국공신이었던 관영과 하후영에 비교하며 그 어떤 비난도 없이 매우 후하게 평가했던 걸 보면 인품이 무척이나 훌륭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조운은 장수의 기본 덕목인 용맹과 냉철함을 겸비한 용장임과 동시에 그 외의 분야에서도 훌륭한 인격과 성품을 가진 인물이란 소리죠

임관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유비나 제갈량 같은 촉나라의 최고실세 곁에서 최측근으로 있었던 만큼 어깨에 힘이 좀 들어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게 조운의 위치였지만 당대의 평가, 후대 사람인 진수의 견해, 사서에 보이는 행적 등 어디에서도 조운의 인간성에 대한 지적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그런 부분에 대한 평가가 굉장히 높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조운이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부족하다는 의견이 있는데 조운의 특기 분야는 애초부터 야전군 사령관이 아니었죠

조운은 야전군 지휘보단 황궁과 국경을 수비하고 유비나 제갈량의 곁을 지키는 일종의 친위대장 역할로 활약했습니다

유비와 제갈량이 조운에게 맡긴 일들을 보면 조운의 주요 역할은 야전에서의 작전 지휘가 아니라 근위대를 이끌고 유비를 직접 수행하거나 정예병들을 선발해 군대를 관리감독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죠

 

전투에 투입되는 상황이 있더라도 일군의 지휘관보다는 총사령관인 유비나 제갈량의 직속 돌격대장을 맡거나 별동대 또는 부대의 후방관리역할을 주로 맡았습니다

그런데도 몇몇 전투에서는 얼마 안 되는 부대를 이끌고 위나라 대군의 눈앞에서 미끼 역할로 버텼던 걸 보면 그가 지휘관으로서 무능했다고 비판하기보다는 자신의 특기 분야가 아님에도 임무를 꽤 잘 수행했다고 호평을 받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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