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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사건 탐구

개구리소년 사건. 대한민국 최악의 미제사건

by 사탐과탐 2022.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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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악의 미제사건이었던 개구리소년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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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 중 가장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것은 바로 개구리소년사건이라 불리는 대구 성서 초등학생 살인 암매장 사건입니다 

사건이 발생한 지 3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범인을 잡지 못한 탓에 인터넷에서는 범인의 정체와 범행을 저지른 이유에 대한 썰이 끊임없이 떠돌았죠 

 

올해 6월 1일에도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나는 개구리소년 사건에 쓰인 흉기가 뭔지 알고 있다'라는 제목의 게시글이 올라오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글을 올린 사람은 지난 2011년 5월 14일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피해자 두개골의 손상 흔적을 본 순간 범행에 사용된 도구와 범인의 정체까지 알아냈다고 주장했죠 

 

그는 범인들의 정체가 근처 공업고등학교에서 다니던 일진 학생들이고 그들이 본드를 마시고 환각상태에 빠져 범행을 저질렀으며 범행에 사용된 도구는 공고 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버니어 캘리퍼스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조사 결과 경찰이 수사를 했던 2002년 9월에 이미 흉기가 버니어 캘리퍼스라는 제보가 있었고 경찰이 유골의 흔적과 비교를 해가며 조사작업을 한 결과 유골의 손상 흔적과 버니어 캘리퍼스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난 후였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당시 정황을 분석해보면 그 사건은 살인에 매우 익숙한 사람이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므로 본드를 마시고 환각에 빠진 고등학생이 저질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되면서 그 글의 주장은 신뢰성을 잃게 됐죠

 

사건이 발생한 1991년 3월 26일은 기초자치단체 의원을 뽑는 지방선거일이라 임시공휴일로 지정됐습니다

그날 아침 8시쯤 대구 성서초등학교에 다니던 6명의 아이들은 그중 한 명인 조호연군의 집 근처에서 놀고 있었는데 조호연 군의 집 근처에서 세 들어 살고 있던 청년에게서 시끄러우니 나가서 놀라는 핀잔을 듣고 근처에 있는 와룡산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중에서 김태룡 군은 위험하니 너무 멀리 가서 놀지 말라는 부모님의 말이 생각나 혼자 집으로 돌아갔죠

 

덕분에 그는 유일하게 불행을 피해 간 생존자가 되었습니다

지역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이들은 도롱뇽 알을 찾기 위해 9시쯤에 와룡산을 오르기 시작했으며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2시간 만에 갔다 올 수 있을까?"라는 말을 주고받았다고 하죠

특히 같은 학교 4학년에 다니던 함승훈 군은 아이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매우 중요한 증언을 남겼습니다

와룡산 바로 밑에 있는 군인 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그는 사건 당일 평소 알던 동네 형들과 함께 도롱뇽 알을 찾으러 와룡산 계곡에 갔다고 하죠

 

그런데 형들과 떨어져 혼자서 와룡산 중턱에 있는 무덤가 근처까지 올라간 순간 산 위쪽에서 10초 간격으로 날카롭고 다급한 비명소리를 2번이나 들었다고 합니다

성인이 된 함승호 씨는 SBS와의 인터뷰에서 밝히길 그날 그가 들은 비명소리는 살면서 두 번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끔찍한 소리였다고 했죠

함승호 씨는 그때가 점심 먹기 직전이었으니 11시 30분쯤 되었을 거라고 증언했는데요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은 그와 같이 올라갔던 다른 형들은 그 비명소리를 들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피해자들 중 김종식의 어머니와 허도선의 어머니는 함승호 씨가 산에서 비명을 들었다는 11시 30분쯤 갑자기 가슴이 오그라드는듯한 묘한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고 하죠

그래서 그녀들은 아이를 찾아 집을 나섰다가 아이들이 친구들끼리 와룡산에 갔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기다렸지만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걱정이 된 부모들은 오후 6시부터 와룡산 주변에서 아이들을 찾아봤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자 8시가 될 때쯤 경찰에 신고를 했고 경찰들은 아이들이 와룡산에서 길을 잃었다고 판단

그들의 부모들과 다음날 새벽 3시까지 온 산을 샅샅이 뒤졌지만 결국 아이들을 찾지는 못했죠

사건 초기 경찰은 별다른 근거도 없이 5명의 아이들이 가정불화로 가출한 것이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려버렸습니다

 

5명 아이들의 가정은 모두 별 문제가 없이 화목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가출할 만한 이유가 딱히 없었던 데다 5명의 아이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가출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말이죠

경찰들은 그저 가출한 아이들이 불량한 동네형들의 꼬임에 넘어가 불법적인 일에 이용되고 있다고 판단하며 그쪽 분야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지만 제대로 헛다리를 짚은 그들이 단서를 발견해낼 리가 없었고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그러다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전국에 알려지면서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가 특별지시를 내려 군과 경찰을 총동원해 수색에 나섰고 개구리 소년들이 실종된 와룡산 주변을 비롯한 전국을 샅샅이 뒤졌는데요

 

5월 5일부터 시작된 수사는 7월이 되자 대구에 수사본부까지 차려지면서 와룡산 주변에 대한 수색을 계속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도 약 5년간 30만 명의 인원을 동원해 각종 복지시설이나 종교단체 그리고 가정집들을 돌며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방에 대해 묻고 다녔지만 제대로 된 소득을 얻지는 못했고 현상금을 노린 사람들이 허위제보를 하거나 자신이 아이들을 데리고 있다며 장난전화를 하는 바람에 헛수고만 계속했다고 합니다

 

경찰뿐만 아니라 민간기업인 포항제철에서도 현상금 1천만 원과 8만 장의 전단을 사람들에게 뿌리며 수색에 협조했고 한진그룹 등에서는 무려 100만 장의 전단을 임직원과 고객들을 상대로 뿌리며 수사에 협조했으며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 기업들이 소년들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죠

하지만 피해자들의 부모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생업조차 포기한 채 몇 년이나 수색을 이어갔음에도 소년들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피해자들 중 김종식 군의 아버지 김철규 씨는 자식을 잃은 슬픔이 너무나 큰 나머지 매일을 술로 달래다 간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죠

하루아침에 5명의 소년들이 증발해버린 탓에 많은 사람들은 북한 공작원이 소년들을 납치해갔다 UFO에 납치됐다는 등 온갖 터무니없는 썰을 퍼뜨렸으며 곳곳에서 자신이 소년들을 납치했다는 허위신고를 하는 사람들까지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10년의 세월이 지나 그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거의 사라진 2002년 9월 도토리를 주우러 와룡산에 올라갔던 오무근 씨가 와룡산 새방골 중턱에서 5명의 유골을 발견해냈죠

와룡산에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수색을 했음에도 그 유골들을 발견하지 못한 이유는 새방골이 실종 당시 아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불미골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그렇게 멀리까지 갔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 수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시신 발견 당시 신고를 받고 출동한 달서경찰서에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현장보존도 제대로 하지 않고 과학수사대도 부르지 않은 채 곡괭이 등을 이용해 마구 땅을 파헤치면서 현장을 훼손시켜버렸다고 하죠

게다가 정확한 부검과 현장감식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타살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아이들이 조난을 당해 추위에 떨다가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고 결론을 내려버리며 사람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습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보도된 영상을 보면 당시 현장에 있던 의경들이 삽질을 마구 하고 형사들은 유골을 함부로 마대에 정리해 담아놨는데 그 영상을 지켜본 서울대학교 법의학과 이윤성 교수는 기가 막혀서 한동안 말을 잃었을 정도였죠

이후 법의학자들이 부검을 한 결과 소년들은 둔기 또는 흉기에 의해 타살된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지만 범인이 누구인지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그리고 어떤 도구를 사용했는지 아무것도 밝혀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아무런 단서도 찾아내지 못한 채 2006년 3월 26일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됐으며 2015년엔 내사마저 종결됐기에 이제는 범인이 잡힌다 해도 그를 처벌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 돼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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