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 원전 폭발 이후에 있었던 사실들과 왜 최악의 원전사고였는지 그 이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3분 고요하고 평화로운 새벽을 깨트리는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습니다
바로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4호기에서 폭발이 일어난것이죠
이 폭발로 인해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400배가 넘는 방사능이 유출되었죠
그렇게 인류 역사상 최악의 원전 사고가 일어나고 만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소련의 대처도 정말 어처구니 없는데요
오늘은 체르노빌 원전 폭발 이후에 벌어진 이해할수 없고 충격적인 일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체르노빌 원자로가 폭발했을때 4호기에서 근무중이던 200여명의 직원들은 사고의 피해를 줄이기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원자로가 폭발해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뿜어져 나오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는 사실도 모른채 달궈진 원자로의 열을 식히기 위해서 냉각수 벨브를 열러 폭발 현장으로 달려갔던 직원들도 있었죠
하지만 엄청난 양의 방사능에 그대로 노출되어버리다 보니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구토를 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방사능에 피폭된 사람들의 증상은 끔찍했는데 불이 닿지도 않았지만 온몸은 화상을 입은것 같은 상태였으며 이 화상자국은 전신으로 점점 번져갔죠
피부색도 붉은색에서 보라색으로, 보라색에서 짙은 흑갈색으로 변해갔으며 나중에는 피부가 낱장처럼 한장한장 벗겨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피폭된 사람들은 상상할수 없는 끔찍한 고통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죠
체르노빌 직원들은 방사능의 위험성을 대충은 알고 있었고 현재도 방사능이 유출되고 있다는것도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방사능 수치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인데요
사고가 벌어지자마자 책임자였던 댜틀로프가 측정을 해보니 시간당 3.6 뢴트겐이라는 수치가 나왔던 것이죠
방사능 수치가 시간당 8천 뢴트겐에 사람이 노출되면 바로 즉사 한다고 하는데 생각보다 적은 숫자인 3.6 뢴트겐 밖에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점은 당시 댜틀로프가 사용한 방사능 측정기는 측정할수 있던 최대 방사능양이 3.6 뢴트겐 밖에 되지 않았던 소형 측정기였던 것이죠
나중에 4호기 근처에서 고성능 측정기로 다시 측정했을 때 시간당 1만 뢴트겐이 측정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방사능에 피폭된건 직원뿐만이 아니었는데요
폭발이 일어나자 곧바로 소방서에 신고전화가 갔고 이에 14명의 소방대원이 출동했죠
그리고 새벽동안 200여명의 소방관이 투입되어 다행히 4호기 주변의 화재와 3호기 지붕에 붙은 불을 진압하면서 3호기까지 폭발하는 최악의 사태는 막아낼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엔 방사능의 위험성이 사람들에게 제대로 알려져있지 않았죠
그 이유는 전세계가 핵 경쟁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핵무기를 보유한 나라에서는 방사능의 위험성을 국민들에게 알리지 않고 쉬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 투입된 소방관들 역시 방사능을 막아줄 방호복도 갖추지 못한 채 4호기의 가장 가까운곳에서 진화작업을 했기 때문에 무사할수는 없었던 것이죠
그렇게 밤새 화재를 진압하던 소방관들이 여기저기서 구토를하며 쓰러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방사능에 대한 무지가 만들어낸 비극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는데요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직원은 새벽에 발전소장 브류하노프에게 보고했지만 그는 이를 가볍게 무시해버렸고 인근 도시 주민들에게 알려 대피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묵살해버렸죠
그리고나서 브류하노프는 당시 소련의 최고 지도자인 고르바초프에게 연락해 4호기에서 불은 났지만 원자로는 안전하다고 거짓보고까지 올렸습니다
거기다가 방사능 수치 역시 안정적이라고 하고 피폭으로 인한 인명피해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죠
하지만 사고가 터지고나서 9시간이 지났을 때 소련 각료 회의 부의장인 셰르비나와 군인과 과학자 대표들이 현장에 오고나서야 발전소장의 보고가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원자로가 폭발해 막대한 양의 방사능이 유출되고 있다는 상황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사고 대책을 마련하기위한 위원회가 만들어졌죠
그런데 체르노빌 원전에서 불과 3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곳에 인구 5만명의 프리퍄트라는 도시가 있었는데 육안으로도 체르노빌 원전이 보였을 정도이니 이미 이곳에도 막대한 양의 방사능이 도시를 덮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련 정부의 대응은 충격적인데요
무시무시한 방사능이 도시를 덮치고 있었지만 대피하라는 안내방송 한번 하지 않은것이죠
그러다보니 프리퍄트 시민들은 방사능에 피폭되고 있다는것도 모른 채 평소처럼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폭발이 있은지 36시간이 지난후에야 비로소 도시 곳곳에서는 대피용 버스를 타라는 안내방송이 울려퍼졌고 그곳의 사람들은 갑작스레 자신들이 살던 터전을 급하게 떠나야 했죠
사건이 발생하고 하루가 지났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4호기 원자로 안에서는 계속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소방관들이 연신 물을 뿌려댔지만 원자로 내부의 불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죠
그러자 대책위원회에서는 헬기를 이용해 모래와 납, 그리고 붕소 등을 뿌리기로 결정했습니다
헬기 조종사들은 방사능 피폭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조종석 아래에 납으로 만든 총알들을 깔았으며 납판을 대기도 하면서 임무를 수행했죠
하지만 이미 엄청난 양의 방사능을 내뿜고 있던터라 그것을 막을길은 없었고 그렇게 조종사들마저 방사능에 피폭되었습니다
다행히 소방관들과 조종사들이 목숨을 건 사투를 펼친덕분에 이틀이 지나자 화재는 서서히 진압되어가고 있었죠
그러나 여전히 원자로 내부에서는 계속 핵분열을 하면서 막대한 양의 방사능을 분출하고 있었고 이 방사능 물질은 이미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소련은 이 사실을 철저히 비밀로 부쳤기 때문에 주위 나라에서도 알길이 없었지만 이를 최초로 알아챈 나라가 있었으니 그 나라는 바로 스웨덴이었죠
폭발이 있고 3일째가 되던날 월요일 아침에 스웨덴 스톡홀름에 포르스마르크 원전의 직원들이 출근한 뒤 갑자기 방사능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던 것입니다
이에 큰일났다 싶어 원전을 조사했지만 내부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자 어디서 이 방사능이 흘러왔는지 바람의 방향을 통해 추측해보니 그곳은 바로 소련의 체르노빌 원전이었던 것입니다
체르노빌과 프르스마르크 원전까지 직선거리가 약 1100km나 되는 엄청 먼 거리였는데 방사능이 바람을 타고 그 먼곳까지 날아갔던 것이죠
그리고 체르노빌로 부터 뿜어져 나온 방사능은 유럽의 몇몇 곳을 제외하고 대부분 지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에 고르바초프는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전문가들을 통해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진실을 알게 되었죠
그러나 소련 정부의 대처 방안은 계속해서 비밀로 한다였습니다
원전 폭발사고는 소련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내는 일이었기 때문에 아주 제한된 정보만 발표하고 중요하고 심각한 내용은 외부에 알리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다 사고 6일째인 5월 1일 노동절이 다가왔습니다
당시 노동절은 모두가 쉬는날이었으며 키예프에서는 대규모 노동절 행사까지 예정되어 있었죠
당연히 소련 정부는 행사를 취소하고 사람들을 대피시키는게 맞는 대응이었지만 오히려 행사를 진행해버렸습니다
이 상황에서 만약 행사를 취소하면 국내외에서 의심을 살수 있고 행여나 진실이 알려질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죠
그래서 키예프 시민들은 방사능에 피폭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아이들과 축제를 즐겼습니다
그러다보니 결국 키예프 사람 중 엄청나게 많은수의 사람들이 방사능에 피폭되고 말았죠
하지만 소련은 계속해서 모른채 했고 그러면 그럴수록 상황은 더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원전 내부에서 타고 있던 핵연료 200여톤이 바닥에 시멘트를 녹이며 마그마가 되어 계속해서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화재 진압을 위해 소방관들이 뿌렸던 물들이 그곳 아래에 탱크에 가득 고였고 만약 방사선 마그마 200톤과 엄청난 양의 물이 만나게 되면 대폭발이 일어날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던 것이죠
서둘러 물을 빼지 않으면 더 큰 참사가 벌어질것이 자명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결국 뒤늦게 키예프 주민들에게 긴급 대피령이 내려졌고 키예프 주민 약 50만명이 급히 도시를 빠져나가기 시작했죠
한편 또 한번의 대형 폭발을 막으려면 아래에 고여있는 물을 사람이 직접 내려가서 수동으로 뺐어야 했는데요
불타고 있는 핵 연료 바로 아래였기 때문에 그곳에는 방사능 오염이 얼마나 되있을지 예측도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사태의 심각성을 설명받은 직원 중 3명이 (보리스 바라노프, 발레리 베스팔로프, 올렉시 아나넨코) 지하로 내려가 물을 빼내겠다고 지원했죠
그렇게 그들은 방호복은 없이 잠수장비만 달고 원자로 아래 지하복도로 내려갔습니다
그들이 가는 길에는 방사능 마그마가 녹아 내려오는 구간도 있어서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위험구간을 지나 지하실의 물을 빼는데 성공했죠
그들이 목숨을 걸고 대폭발의 위험을 막아낸 셈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소련 정부에서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지만 주변 국가들의 진실 규명 요구가 빗발치자 결국 사고 발생 19일째인 5월 14일이 되어서야 고르바초프가 원전 사고에 대해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연설을 하게 되었죠
그러자 위기에 처한 국민들을 외면하고 모든걸 숨긴 소련 정부의 태도에 전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리고 폭발 후 21일째가 되는 5월 16일.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는데 타고있던 핵연료가 땅을 파고 계속 밑으로 내려갈수 있었고 만약 그렇게 되서 지하수와 만나기라도 한다면 전세계가 위험해질수있는 상황이었던 것이죠
대책위원회는 토론끝에 원자로 아래까지 땅을 파고 들어가 핵연료 아래쪽에 냉각장치를 설치해서 핵연료를 식히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각지에서 광부들을 소집했는데 이때 모인 광부들이 400여명이나 되었죠
그래서 원자로 아래까지 내려가는 땅굴을 파기 시작했는데 땅굴 속 작업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땅밑의 온도는 50도에 육박했고 시간당 방사능 수치도 최대 300뢴트겐까지 치솟기도 했던것이죠
아무런 방호장비도 갖추지 않은채 작업을 하다보니 결국 광부들 역시 방사능에 피폭되었고 그들 중 4분의 1은 40세가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광부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냉각장치를 설치하지 못했는데요
다행히 방사능 마그마가 땅속까지 뚫고 내려가진 않았던 것이죠
하지만 여전히 많은 양의 방사능을 뿜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 정부에서는 4호기 전체를 콘크리트로 덮어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원자로 인근은 1만 뢴트겐에 육박할 정도로 심각한 수준의 방사능이 유출되어서 그곳에서 사람이 2~3분만 있어도 목숨을 잃을수도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대신할 원격조종 로봇을 투입하기로 했죠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방사능 수치가 너무 높아 불과 며칠만에 로봇들도 고장나고 말았고 결국 어쩔수 없이 사람을 투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콘크리트 구조물 건축에 투입된 사람들은 스스로를 바이오 로봇이라고 불렀다고 하죠
시간을 계속 지체했다가는 더 큰 참사로 이어질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방사능 방호복도 제대로 갖춰입지 못하고 납으로 된 팬티나 앞치마 등 급조된 방호복을 대충 걸치고 그곳으로 투입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작업을 끝내기 위해 열심히 일했고 12일 동안 약 4000여명이나 되는 일명 바이오 로봇이 그곳에 투입되었죠
작업을 다하고 그곳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몸을 움직이지도 못할정도의 고통을 느꼈는데요
작업을 하고나면 눈이 빠질듯이 아팠고 입안에서는 금속맛이 났으며 입안이 마비되어 치아 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작업한 대가로 어느정도의 돈과 표창장 같은 증서 한장 달랑 받았다고 하죠
이 이후부터 소련 곳곳에서 체르노빌 오염제거를 위해 수십만명의 사람과 물자들이 체르노빌 원전으로 몰려왔습니다
이들 역시 방사능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자신들이 그곳에서 무슨일을 하는지도 모른채 작업에 투입되었죠
그러다 결국 수십만명이나되는 사람들도 방사능에 피폭되고 말았고 끔찍한 고통에 내몰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덕분에 사고가 벌어지고 7개월의 시간이 흘렀을 때 드디어 4호기를 콘크리트로 덮을수 있었죠
그렇게 간신히 방사능 유출을 막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감추고 사고를 키웠던 책임자 3인은 재판이 열려 각각 10년 징역형을 받았지만 훗날 1991년에 소련이 붕괴되자 불과 4년만에 석방되었다고 하죠
어쨌든 이 사고 이후 많은 나라에서 소련 공산당의 위신은 급격히 추락해 국제사회에서 설자리가 없어진 소련은 결국 1991년에 붕괴되고 말았습니다
예전 2006년 세계보건기구는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암이나 백혈병 등으로 사망한 사람이 9000명을 넘을 수 있다고 밝혔는데 환경단체 그린피스는 그보다 10배가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주장했죠
또한 체르노빌이 고향인 수십만명의 사람들 역시 현재까지도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체르노빌에 예전처럼 다시 사람들이 살수 있으려면 약 2만 4천년의 시간이 걸린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죠
현재도 수많은 나라에서 핵무기를 가지고 있고 무기는 없지만 원자력 발전소가 없는 나라가 없을 정도이니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는 과거에 끝난 이야기가 아닌 현재도 얼마든지 일어날수 있는 이야기 같네요
지금까지 체르노빌 폭발사건 이후에 있었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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