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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곽회. 삼국지연의에서 제대로 너프 당했지만 실제로는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을 막아낸 장본인

by 사탐과탐 2023.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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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연의에서는 촉나라의 샌드백이었지만 삼국지 정사에서는 정반대로 촉나라 담당일진이었던 위나라의 명장 곽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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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와 실제 역사의 기록에 차이가 있는 인물들은 굉장히 많지만 그중에서도 오늘 소개해드릴 인물만큼 너프를 많이 당한 장수를 찾기는 쉽지 않을 텐데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실제 역사 속에서 제갈량을 상대로 굉장히 잘 싸웠지만 연의에서는 나올 때마다 제갈량에게 두들겨 맞기만 하는 장수로 너프당한 비운의 인물 곽회입니다 

 

곽회의 할아버지는 대사농 벼슬을 지낸 곽전이었고 아버지는 안문태수를 지낸 곽온이었기 때문에 곽회는 세도가 가문 출신들을 위한 인재등용제도인 효렴으로 천거되면서 벼슬살이를 시작했죠 

조비의 눈에 들게 되면서 문하적조로 일하던 곽회는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정벌하러 갈 때 그 원정을 따라가게 됩니다 

하후연의 사마로 있던 곽회는 유비와의 싸움 때는 병에 걸리면서 출전하지 못했지만 하후연이 죽은 후 장합을 사령관으로 추천하면서 혼란에 빠진 부대를 빠르게 안정시키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되죠 

 

이후 유비가 한수를 건너 공격해오려 하자 다른 장수들은 강 근처에 진을 세워 유비를 막으려 했지만 곽회는 이를 반대하며 오히려 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진을 치면서 적들을 유인한 후 적이 강을 반쯤 건넜을 때 공격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는 계책을 냈죠

다른 장수들도 그 말을 옳게 여겨 곽회의 의견대로 하자 유비는 위군의 이런 움직임을 의심스럽게 여겨 강을 건너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그 소식을 들은 조조는 곽회를 크게 칭찬하며 그에게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후 조조가 죽고 위왕의 자리를 물려받은 조비가 헌제에게 황제의 자리를 강제로 양보받아 새로운 황제가 되는 사건이 있었고 얼마 후 조비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행사가 수도에서 성대하게 열렸죠

그런데 당시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곽회는 서둘러 달려갔지만 하필 병에 걸리는 바람에 그가 도착을 했을 때는 이미 잔치가 시작된 후였다고 합니다

조비는 정색을 하면서 곽회를 불러놓고는 옛 고사를 한 가지 들려줬는데 바로 하나라의 우왕이 제후들을 불렀을 때 늦게 온 사람을 죽였다는 일화를 들려주며 곽회에게 이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던졌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보통사람 같으면 대놓고 자신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말을 듣고 겁을 먹었겠지만 곽회는 너무나도 태연한 말투로 "옛날 요순시대(중국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에는 엄격한 법보다 덕으로 백성들을 다스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신은 요순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죽지 않을 거 같습니다"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비는 크게 기뻐하며 곽회를 처벌하는 대신 오히려 옹주자사로 승진시켜 줬다고 하죠

 

그렇게 옹주자사가 된 곽회는 이후 북벌을 시도하는 촉군과 여러 차례 부딪히게 됩니다

1차 북벌에서 곽회는 가정전투에서 장합이 마속을 공격할 때 열유성에 있던 고상의 부대와 싸워 승리한 후 농서의 유명한 강족인 당제를 상대로도 승리하는 공을 세우며 건위장군이 되었죠

3차 북벌에서는 촉의 장수 진식이 무도와 음평을 공격해 오자 곽회가 병사들을 끌고 맞섰지만 제갈량까지 직접 출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무도와 음평을 내준 채 후퇴해야만 했습니다

 

4차 북벌에서 곽회는 양계에서 위연의 부대와 싸워 패하고 상규에서도 제갈량이 보낸 위연에게 박살이 나는 등 연달아 패배를 겪게 되지만 5차 북벌에서는 제갈량의 계책을 계속해서 꿰뚫어 보며 사마의를 도와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을 막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되죠

오장원에서 사마의가 이끄는 위나라의 군대와 대치하고 있던 제갈량은 적군의 허를 찌르기 위해 최단거리로 공격을 해오는 루트가 아닌 서쪽의 북원이라는 곳을 통해 사마의의 부대를 노리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위나라의 장수들 중 누구도 그런 제갈량의 계책을 눈치채지 못했는데 오직 곽회만이 제갈량이 북원을 침공해 올 것이라는 주장을 했고 조금은 뜬금없는 곽회의 의견을 사마의가 받아들이면서 북원에 원군을 보낸 끝에 촉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회심의 작전이 실패했음에도 제갈량은 포기하지 않은 채 이번에는 동쪽의 양수라는 곳을 통해 사마의의 군대를 공격하려 했는데 마치 신들린 것처럼 이번에도 제갈량의 생각을 읽은 곽회가 이번에는 촉군이 양수로 올 것이라고 사마의에게 진언을 올렸죠

이에 위군은 양수에 군대를 파견했고 그곳에서도 촉군을 격파하게 됩니다

 

244년 위나라의 권력자 조상이 촉의 한중을 공격하면서 흥세전투가 벌어졌을 때 조상은 사마의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은 채 무리하게 한중을 공격했고 이후 촉군과 전투를 하는 과정에서 위군은 큰 피해를 입게 되는데 곽회도 이때 선봉으로 출전했지만 위군이 불리 해질 것이란 걸 눈치채고는 즉시 자신이 이끄는 군사들을 적지에서 탈출시키면서 위기를 벗어나게 되죠

247년 옹주와 양주의 이민족들인 아하 소과 치무대 아치새 등이 반란을 일으켜 위를 배신하고 촉의 군대를 불러들이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곽회는 하후패가 지키는 위시로 진격해 오는 강유의 군을 막아낸 뒤 아하소과가 이끄는 부대를 공격해 그의 목을 베어버리고는 그가 이끄는 부족의 항복을 받아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248년에는 황하일대에서 위에 맞서던 아차새의 무리를 쓸어버린 후 무위군을 약탈하고 복귀하던 치무대의 부대까지 격파해 버렸으며 돌아가는 길에는 금성군 영거현에 있던 이민족의 무리까지 물리치며 반란군의 남은 잔당들을 모두 쓸어버리는 공을 세웠죠

이때의 공으로 곽회는 도향후로 승진하게 되었으며 이후 촉의 강유와 요화가 곽회에게 패한 반란군의 무리를 자신들의 편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249년 고평릉사변을 일으켜 위나라의 정권을 잡게 된 사마의는 곽회를 관서의 최고 책임자로 임명해 본격적으로 촉의 침공을 대비했죠

 

이전까지 곽회는 단독으로 전략을 세워 싸우는 모습을 주로 보였지만 이때부터는 진태와 등애 등의 계책을 받아들여 싸우는 등 총사령관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249년 강유가 국산이라는 지역에 두 개의 성을 쌓으며 위를 압박하기 시작하자 진태는 곽회에게 "국성이 비록 튼튼하게 잘 지어지기는 했지만 촉땅에서부터 군량을 보급하려면 멀고 험한 길을 지나와야 하기 때문에 저희가 성을 포위하고만 있으면 군량이 부족해진 적군은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라는 조언을 했고 곽회는 진태의 조언을 받아들여 성을 포위한 채 적의 보급로를 끊어버렸죠

 

우두산에 있던 강유는 그 소식을 듣고는 국성에 있던 구안과 이흠을 구하기 위해 출진했는데 곽회는 오히려 병력을 이끌고 비어있던 우두산을 점령해 강유가 도망갈 길을 막아버렸는데요

결국 상황이 불리해져 가는 것을 느낀 강유는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고 강유의 도움을 받지 못하자 희망을 잃은 구안과 이흠은 위에 항복을 하게 되죠

그렇게 곽회는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관중에서 이민족과 촉군을 물리치고 한편으로는 문제없이 백성들을 잘 다스린 공을 인정받아 거기장군의 직위를 받았으며 3천 호에 가까운 식읍까지 하사 받았다고 합니다

251년에는 왕릉이라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사마의에게 토벌되었는데 하필이면 곽회의 부인이 바로 이 왕릉의 누나였기 때문에 역적은 삼족을 모두 멸하던 그 시대의 분위기상 위의 조정에서는 곽회의 부인을 잡아가기 위해 사람을 보내왔죠

이때 곽회의 부하들을 비롯해 곽회의 아래에 있던 수많은 강족과 호족의 우두머리들이 곽회를 찾아와 머리를 조아리며 위나라 조정에 부인을 용서해 달라는 상소문을 올려줄 것을 청했지만 곽회는 그들의 청을 거절한 채 부인이 끌려가는 것을 지켜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정에서 나온 사람들이 곽회의 부인을 끌고 가려 하자 수많은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고 분노하면서 그녀를 데려가지 못하게 막으려 했죠

곽회의 다섯 아들들 또한 아버지를 찾아가 머리를 바닥에 찧어 피를 철철 흘려가면서까지 곽회에게 청을 올리면서 결국 곽회도 더 이상 사람들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병사들을 보내 위의 수도로 끌려가는 부인을 되찾아오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수천 명의 기병이 즉시 추격을 해서 곽회의 부인을 다시 모시고 돌아오자 곽회는 사마의에게 아내를 살려줄 것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죠

편지에는 만약 자신의 다섯 아들들이 어머니가 죽으면 당장에 자신들의 목숨을 끊을 기세인데 만일 자신의 부인이 죽는다면 다섯 아들 또한 죽을 것이고 아들들이 모두 죽는다면 자신 또한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니 차라리 부인대신 자신을 벌해달라는 내용이 써져 있었습니다

서찰을 본 사마의는 촉을 상대하는데 꼭 필요한 인재인 곽회를 차마 처벌할 수는 없었는지 그녀의 부인을 사면해 주었죠

 

255년에 세상을 떠난 곽회는 대장군에 추증된 후 정후라는 시호를 받게 됩니다

연의에서 곽회는 조진과 함께 제갈량의 북벌을 막기 시작할 때부터 계속해서 제갈량에게 당하기만 하는 샌드백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마지막에는 도망가는 강유를 쫓으며 활을 쏘던 도중 강유가 오히려 곽회가 날린 활을 손으로 잡아내는 신기를 보여주더니 거꾸로 강유가 쏜 화살을 맞고 죽게 되는 비운의 인물이지만 실제 곽회는 한중 공방전에서부터 제갈량의 북벌과 강유의 북벌에 이르기까지 촉나라를 상대하는 전선의 핵심으로 활약했던 명장이었는데요

 

비록 그 과정에서 패배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촉한의 북벌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막아낸 장수로 함께 전장에서 활약한 사마의나 장합에 결코 밀리지 않는 공적을 세웠죠

이상하게 위연에게는 연달아 패배를 당하며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그 외에 제갈량이나 강유 등을 상대로 큰 활약을 보이며 지금에 와서는 곽회가 촉나라 담당일진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곽회는 특히 제갈량의 5차 북벌 당시 사마의를 비롯한 대다수 장수들이 제갈량의 계책을 예상하지 못한 것과는 달리 유일하게 제갈량의 의도를 미리 예측하며 위가 승리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이후 강유에게 포섭된 강족들을 적절히 컨트롤하는 능력까지 보여주면서 강유는 곽회를 상대로 큰 전과를 올리기 힘들었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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