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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관동대학살. 관동 대지진 수습을 위해 조선인을 모함해 학살한 일본 자경단

by 사탐과탐 2021.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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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관동 지역에 일어난 지진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인을 모함하기 시작했고 이에 일본인 자경단이 구성되어 조선인들을 색출해 죽이기까지 합니다.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일본 관동지역에서 규모 7.9의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고 그 이후로 12시 1분에 규모 7.2의 여진이 그리고 12시 3분에 규모 7.3의 여진이 발생했죠.

게다가 이 무지막지한 지진은 약 5분간 계속되었습니다.

이틀 동안 계속된 규모 6 이상의 지진은 무려 15번이나 일어났고 이 지진으로 인한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죠.

 

이로 인해 20만여 가옥이 부서지거나 불탔고, 14만여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으며 치안도 불안해 사회 전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은 황궁 앞으로 몰려가 대책을 세우라고 난리를 쳤는데요.

일본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지역의 경찰서로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하라는 지시와 함께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 테러, 강도 등을 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까지 보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황당무계한 내용의 지시는 바로 유언비어를 퍼트려 화가 난 민심을 모두 조선인들에게 돌리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유언비어를 처음 조작한 인물은 '미즈노 렌타로' 라는 일본 내무대신으로 조선인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었죠.

 

이 지시는 일부 신문에 실렸고 유언비어까지 더해진 결과

지진을 틈타 사회주의자들과 조선인이 폭도로 돌변해 불을 지르고 국가방위시설과 주요 인사들에게 폭탄을 던지려 한다.
또한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약탈까지 한다.

 

라는 어처구니없는 괴소문이 되어 일본 각지로 퍼지게 되었죠.

괴소문은 퍼지고 퍼지면서 다른 소문까지 더해지며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들이 독이 든 만두를 나눠주고 있다.
조선인들이 일본에 지진이 나게 하는 저주를 퍼부어서 지진이 났다.

 

라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습니다.

지진이 난 후 2시간이 지난, 9월 1일 오후 3시경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인 9월 2일 오전 10시경에는 '조선인의 습격이 있을 것이다' '어제의 화재는 조선인의 방화와 폭탄 투하 때문이다' 라는 소문이 퍼졌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날 밤 일본의 극우들은 "조선인들이 쳐들어올 것이니 여자와 어린애들은 빨리 피난시켜라." "조선인들을 피해 다녀라."라고 외치며 길거리를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지진 이후 발생한 방화, 사망 등의 사건이나 사고들이 점점 조선인의 탓이 되어가기 시작했죠.

그러자 불안감에 사로잡힌 일본인들은 우익들의 선동을 당해 조선인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여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죽창, 몽둥이, 도끼, 일본도, 총기 등으로 무장한 자경단이 결성되었고 이들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검문하기 시작했죠.

그러고는 조선인이다 싶으면 가차 없이 죽였습니다.

일단 조선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바로 찌르거나, 때리거나, 베거나 해서 살해했죠.

거기다 태우기도 했고 여러 명을 묶어서 강물에 던져버리기도 했습니다.

조선인 여자들은 강간을 한 뒤 죽였죠.

 

또한 자경단은 길거리에 바리케이트를 치고 조선인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는데요.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별하기 위해 많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기미가요나 도도이츠를 불러보라던가, 일본어 자음, 모음을 배열해 보라던가 이런 식으로 일본인들만 알만한 것을 시켰을 때 하지 못하거나 더듬으면 조선인으로 여겨 참혹하게 살해했죠.

 

또한 조선인 구별방법으로 사용된 가장 유명한 방법은 바로 "쥬고엔 고쥬센 (十五円五十銭, 15엔 50전)" 이라는 말을 시킨 것인데요.

이는 미묘한 억양 차이로 조선인들이 발음하기 힘들었던 일본말을 시켜서 조선인을 색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당시 일본의 관동지방과 관서지방의 일본인들 억양도 약간의 차이가 있어서 이때 수많은 일본인들도 죽임을 당했고 일본에 있던 중국인들 역시 그러했죠.

살기 위해 경찰서로 도망친 조선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경단에 의해 밖으로 끄집어 내져 무참히 살해 당했죠.

하지만 일본 경찰들과 계엄령에 의해 출동한 일본군은 자경단의 학살을 못 본척하거나 심지어는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경단의 규모는 통제가 불가능할 정도로 커졌죠.

도쿄에 흐르는 강이 조선인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조선인 학살사건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에서는 제대로 보도조차 되지 않았고 훗날 재경유학생대회에서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죠.

 

그러자 조선인들이 이 학살사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일본에서는 조선인들의 폭동 행위 때문이다, 조선인들의 강도와 강간, 방화 때문이다 등 모든 건 조선인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다 이후 일본 정부는 조선인들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들이 유언비어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했고 경찰과 군인들에 의해 자경단은 해산 되었죠.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경찰에서는 자경단 일부를 연행한 뒤 조사한 결과,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거나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 자에 이때 학살당한 조선인은 6,661명이라고 주장했는데요.

정확한 피해자수는 아직 밝혀지진 않았지만 정확한 사실은 이날 엄청나게 많은 조선인들이 학살 당했다는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사건은 훗날 '관동대학살'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오카와 츠네키치 라는 경찰 서장은 조선인을 보호했고 계엄 출동한 일본군은 자경단을 공격해 해산시키고 살해당하기 직전의 조선인을 구출한 사례도 일부 존재한다고 하죠.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아키야마 요시후루도 "조선인들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유언비어에 휘둘리는건 정신력이 약해서이다." 라며 사람들에게 훈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극우파이자 사회주의자였던 '기타 잇키'는 독립운동가 박열을 피신시키기도 했죠.

 

그 참혹했던 현장에 그나마 정상이던 일본인도 있긴 있었나 보네요.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까지 우리 조선인들 탓으로 돌린 나쁜 일본인들은 정말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밉네요.

일제강점기 때 있었던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일본인들의 잔인한 만행, 관동대학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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