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척준경, 송나라 한세충과 동시에 맹활약을 했었던 금나라(여진족) 최강의 소드마스터라 불렸던 사묘아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려에는 소드마스터 척준경이 있었다면 송나라에는 한세충이 있었고 여진족에는 사묘아리가 있었다 라는 말이 있는데요
이들은 모두 동시대에 활약한 명장들입니다
그중에서도 18살의 나이로 고려군을 개박살 내버린 인물이 있는데 그가 바로 사묘아리 이죠
오늘은 여진족의 장수로 고려와 남송, 거란을 상대로 적보다 적은군사 였지만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인물 사묘아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안타깝게도 사묘아리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는데요
1080년~1090년 사이에 태어나 1150~1160년 사이에 사망한것으로 추정하고 있죠
그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나타난 시기는 17살때였습니다
금사에 따르면 아버지 혼탄을 따라 금나라에 귀순한 인물로 나오죠
그리고 17살의 어린나이에 사묘아리는 큰아버지였던 호마곡을 따라 사도를 공격했는데 그때 그의 동생인 사리지를 포로로 사로잡았을 정도의 큰 전공을 세웠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로부터 1년후인 18살때는 아버지 혼탄을 따라 고려와의 전쟁에 투입되는데요
그리고 이후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무공을 펼치죠
당시 고려가 생각하던 여진족은 조공이나 바치던 별거아닌 민족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1차 여진정벌이 있고 난 이후 생각보다 강력한 그들의 모습에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강력한 여진족을 대비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별무반이었죠
그러던 1107년, 국경의 여진족 움직임이 수상하다는 소식을 들은 예종은 17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2차 여진 정벌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갈라전 일대를 빼앗고 그곳의 성들을 점령하려 했던 고려군에 의해 그곳에 살던 수많은 여진족들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가던 터전도 잃고 쫓겨나게 되었죠
심지어 고려군 총지휘관인 대원수 윤관은 손쉽게 땅을 빼앗기 위해 갈라전 일대에 살던 400여명의 여진족 추장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는데 연회가 무르익어 갈때쯤 김부필과 척준경이 이들을 모조리 몰살시켜 버렸고 나머지 이곳에 오지 않았던 여진족들도 최홍정이 기병을 이끌고 가 모두 학살해 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어쨌든 이후 고려는 한달만에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갈라전 일대를 차지했으며 동북 9성을 쌓아 여진족의 공격에 대비했고 그렇게 윤관은 1108년 4월 별무반과 함께 개경으로 귀환했죠
그런데 그 이후부터 고려와 여진족은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지며 고려의 국력이 상당히 소모되기에 이르는데요
이때 사묘아리는 18살의 나이로 아버지 혼탄과 함께 빼앗긴 갈라전 일대를 되찾으려고 출진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많은 전투를 치르게 되었고 1109년 5월 여진군 6만명이 길주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죠
이때 길주성은 이관진이 지키고 있었는데 여진군의 엄청난 공세에도 불구하고 이 악물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고려에서는 오연총에게 병력을 주며 길주성을 구원하게 했는데 얼마안가 오연총이 이끄는 고려군이 *공험진에 도착하게 되었죠
(*공험진은 금사에 목리문전이라고 기록되어 있음)
그리고 이곳에서 고려군은 여진군과 맞딱뜨리게 되고 대군과 대군이 일대 격전(회전)을 벌이게 됩니다
이때 불과 얼마전에 대륙을 호령하던 요나라를 개박살 냈던 고려군은 여진군에도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지만 사묘아리는 고려군 사이를 빠르게 파고들어 고려의 지휘관 장수를 창으로 찔러 죽여버렸고 이에 여진의 사기는 급격히 오르면서 당황한 고려군을 패퇴시키는데 성공했죠
이후 여진군은 석적환의 병력과 합류한 뒤 사묘아리는 선봉에 서서 또다시 고려군을 박살내기 시작했으며 순식간에 동북 9성 중 2개의 성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패퇴한 고려군의 오연총은 도망쳐온 고려 병사들을 수습해 약 5만명의 병력을 다시 만들었고 빼앗긴 2개성을 되찾기 위해 다시 전투에 나섰죠
하지만 이미 여진군은 주요지역을 이미 선점한 상태였으며 고려군은 사묘아리가 이끄는 여진군에 패배해 결국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사묘아리는 조용히 고려군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는데요
마침내 갈라수( 갈라수 = 현재 성천강 ) 앞에서 퇴각하던 고려군 후미부대의 덜미를 잡게 되죠
얼어붙은 강을 힘없이 건너던 고려군은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여진군의 공격에 당황해 진열이 흐트러졌고 이때 사묘아리는 맨 앞에서 우왕좌왕하던 고려군을 학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고려군 후미부대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죠
그리고 오연총이 다시 규합한 7만의 고려군과 다시 한번 회전을 펼치게 되는데 사묘아리의 맹활약에 고려군은 또 다시 처참하게 패배해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한국사에 몇번 있지도 않은 끔찍한 패배를 맞보게 되었으며 이 전투를 훗날 '갈라수 전투'라고 부르게 되었죠
게다가 금사에 따르면 '고려병사들은 가지고 있던 무기와 갑옷까지 버리고 도망가기 바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후 석적환은 사묘아리의 뛰어난 공적을 크게 칭찬하며 말과 함께 상을 내렸다고 하죠
이후 사묘아리는 알새와 오도본과 함께 고려의 타길성을 함락시켰으며 이때는 오도본이 그를 극찬하며 갑옷을 두른 말을 상으로 내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묘아리는 18살의 어린나이에 고려와의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던 것이죠
이후 고려는 윤관을 파견해 다시 여진과 전투를 치르려고 했는데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피해도 컸던 여진에서 고려에 화친 요청을 했고 그나마 체면을 차리고 전쟁을 그만둘수 있는 명분이 생긴 고려는 화친 요청을 받아들였으며 동북 9성도 다시 여진에게 반환했습니다
그렇게 고려는 사실상 여진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죠
그렇게 고려와의 전쟁을 마무리한 금나라는 1115년 원수처럼 여기던 요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도 사묘아리는 엄청난 전공을 세우게 되죠
사묘아리는 고려와의 전쟁에서는 선봉에서서 강력한 힘을 보여줬다면 요나라와의 전쟁에서는 똑똑한 면과 훌륭한 통솔력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사묘아리는 순식간에 신주와 빈주를 함락시켰으며 요나라군이 홀사리성으로 수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쳐들어오자 이때 병력이 100여명 밖에 없었던 사묘아리는 군사들의 옷을 찢어 깃발로 사용해 병력의 수가 굉장히 많아 보이는 계책을 썼고 그렇게 수만명이나 되는 요군을 싸움도 하지 않고 퇴각하게 만들었죠
또한 금나라에서 점령한 소주와 복주에서 거란군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병력이 무려 10만에 달했습니다
이들은 인근 여진족의 마을을 습격해 식량을 약탈하기 까지 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사묘아리는 급히 구원에 나섰고 여러 차례 전투끝에 마침내 반란군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주었으며 그렇게 반란 진압에 성공했죠
그런데 얼마나 전투가 압도적이고 처참했는지 반란군의 시체가 워낙 많아서 강물을 막아 물이 흐르지 않았을 정도라고 합니다
이후로도 그는 요나라의 수많은 지역을 복속시켜나갔고 거란과 해족이 천여척의 배를타고 바다로 도망가자 27척의 배를 이끌고 추격해 그들을 격파하고 천여척의 배를 다 빼앗아 버리는 믿지 못할 전공을 세우기도 했죠
또한 수만명의 요군이 호리특이라는 곳을 공격했을땐 사묘아리는 곧바로 구원군을 이끌고 출진했는데 구원을 가던 도중에 맞딱뜨린 요군 진영에 비단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고 "저자들이 적의 추장들이다!"라고 외친뒤 그대로 병력을 이끌고 돌진해 요군의 장수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는데 성공했으며 적장이 죽자 혼란에 빠진 요군은 모두 도망쳐 버렸죠
그러자 호리특을 공격하던 요군도 근처의 요군이 패퇴했다는 소식과 함께 곧 있으면 사묘아리의 부대가 이곳에 들이닥친다는 소식을 듣고 혼비백산 하며 도망쳐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요나라는 결국 금나라에 의해 멸망 당하고 말았죠
그런데 금나라와 사묘아리의 진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는데요
북송의 황제이던 휘종이 요나라에 바치던 공물을 금나라에 바치면서 함께 요나라를 공격하자는 말에 금나라도 흔쾌히 승낙했던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요나라가 멸망하자 북송은 금나라에 바친다는 공물도 바치지 않고 심지어 요나라의 잔당들과 금나라를 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던 것이죠
이에 개빡친 완안아골타는 곧바로 북송을 공격해 들어갔는데 이때 사묘아리는 1126년과 1127년, 2년동안 벌어진 북송과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는 기염을 토했고 북송의 수도 개봉을 포위했을때 송나라 군사 1만이 야습을 펼치자 이를 격퇴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개봉이 함락되었고 황제이던 휘종과 흠종이 포로로 잡혀갔으며 (정강의변) 그렇게 북송은 멸망하고 말았죠
이때 금나라군에 잡히지않고 도망치는데 성공한 강왕 조구는 새로운 황제로 옹립되었는데 그가 바로 남송의 고종이었습니다
이후 고종은 주전파 관료들을 기용하면서 군사를 소집하는 등 금나라에 복수를 하려고 준비를 해 나가자 이를 가만히 둘수 없었던 금나라는 남송을 공격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1128년, 사묘아리는 남송을 공격해 들어가 양곡현과 신현을 빼앗았고 해주의 남송군 8만명을 격파한 뒤 해주까지 먹었으며 이후에는 양산박에서 남송 해군의 배 만여척을 격파하기까지 했습니다
이후로도 남송의 장수 강민이 장삿배 400여척을 모아 수춘성 인근에 대기중일때 고작 400기의 기병을 이끌고가 남송군 수천명의 목을 날려버리기도 했죠
이후 항주로 가던중 마주친 남송군 2천명을 격파했으며 도적떼들도 박살내고 배 700여척 획득, 회남에서 당해, 대고와 함께 남송군 10만명을 조져버린뒤 배 200척까지 얻었고 고작 4천명의 병사로 동관과 고교진을 함락시키는 등 거침없이 남송을 족쳐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남송의 황제 고종을 사로잡기 위해 뒤를 쫓기 시작했는데 고종이 명주를 거쳐 창국현, 온주까지 도망쳤지만 끝까지 추격했고 고종이 바다로 도망치자 자신도 배를타고 300리(약 117km)나 추격했지만 결국 고종을 놓치고 말았죠
이후로도 명주, 위주, 연수, 석주 등을 함락시키는 등 남송을 박살내는데도 엄청난 역할을 해냈습니다
결국 남송이 스스로 신하라고 자처하면서 재물을 바치자 금나라 희종은 기뻐하며 남송 정벌에도 엄청난 공을 세운 사묘아리에게 천만전을 하사하기도 했죠
그런데 재물에 욕심이 별로 없었던 사묘아리는 자신의 동생에게 모든 재산을 주었는데요
사묘아리 동생은 형이 전재산을 주려고 하자 받기 미안했는지 거절하다가 결국엔 도망쳐버렸는데 사묘아리는 끝내 동생을 찾아내 전재산을 줘버렸다고 하죠
이후 나이가 든 사묘아리는 더이상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고 군선 건조를 담당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묘아리는 고려의 척준경, 남송의 한세충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맹장이라서 "서로 맞붙었다면 누가 이겼을까?" 하는 이야기가 많이 있죠
고려와의 전투때 윤관의 곁에는 척준경이 항상 있었기 때문에 척준경과 사묘아리가 한판 붙을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긴 합니다
어쨌든 사묘아리는 고려와 요나라, 그리고 북송과 남송과의 전투까지 평생을 전쟁터에 있으면서 멸망시킨 나라만 두개나 되고 거의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어버린 나라가 두개나 될 정도이니 사묘아리의 생애를 보면 원나라 수부타이랑 굉장히 비슷한것 같기도 하네요
지금까지 금나라 최고의 명장이었던 사묘아리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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