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촉나라의 북벌을 막아낸 위나라의 에이스 사령관들
하후연, 조진, 사마의, 하후현, 곽회, 진태, 등애 이야기 입니다
끊임없이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처음으로 위와 맞붙었던 전투에서 한중을 차지한 이후로는
딱히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죠
그 이유는 위나라에 비해 촉나라의 국력이 낮았던 것도 있지만
촉나라와의 전선을 지휘하던 위나라 사령관들의 능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1. 하후연
조조의 친척 동생인 '하후연'은
훗날 장합과 조진, 곽회라인으로 이어지는
대 촉나라 전선을 담당하는 사령관 자리를 처음으로 맡은 인물이었죠
215년 장로가 다스리던 한중을 점령한 조조는
하후연을 정서장군으로 임명한 후
그에게 촉나라를 상대하는 대촉전선의 총사령관 임무를 맡겼죠
하후연은 조조군내에서 기동전에 가장 능했던 장수였기 때문에
도겸과 싸우던 조조가 연주를 여포에게 빼앗겨버렸을 때
가장 먼저 연주 쪽으로 파견한 장수가 바로 하후연이었다고 합니다
![](https://blog.kakaocdn.net/dn/b92jEG/btsHqNqGEpO/3jcqBkcfALCdprDt4sMLv1/img.jpg)
관도대전에서도 조조는 이런 하후연의 뛰어난 기동력을 살려
여러 차례 토벌전에 그를 파견했으며
한중에서는 전투에서 패배한 마초를 추격하는 임무를 하후연에게 맡겼습니다
이처럼 하후연은 삼국지 전체 역사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기동전의 대가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후연이 무력에만 의존하는 스타일의 장군이었기 때문에
돌격대장의 임무를 맡았을 때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지만
한 지역의 군대를 다스리는 총사령관 역할을 맡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는 것이죠
때문에 조조도 여러 차례 하후연에게
용맹에만 의지하지 말라며 충고를 했지만
하후연은 끝내 조조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은 채
219년 정군산에서 유비가 파놓은 덫으로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후 10년의 세월 동안 한중 지역에서는 별다른 전투가 없이
관우가 맡고 있던 형주지역에서 촉과 오의 전투가 치열하게 펼쳐졌죠
그러다 유비, 관우, 장비 3형제가 모두 죽고
228년 제갈량이 첫 번째 북벌을 시도하면서
또다시 위와 촉이 격돌하게 됩니다
이때 제갈량을 상대한 인물은 바로 조조의 조카인 조진이었죠
![](https://blog.kakaocdn.net/dn/cWGUVt/btsHp2oC0mS/3ZsPrWopreJ9wICgLsQNtK/img.jpg)
2. 조진
조조가 키우는 차세대 에이스 중 한 명이었던 조진은
조조가 죽은 후 조비가 황제로 즉위하자
조휴와 함께 대장군 직위에 오르며 위나라의 실권자가 되었습니다
조비의 아들인 조예가 황제가 된 시절에도
조진은 여전히 조휴와 함께 위나라 군부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조휴가 오나라와의 전선을 담당하고 있었다면
조진은 촉나라와의 전선을 담당하는 총사령관이었죠
유비가 죽은 후 제갈량은 총 다섯 차례의 북벌을 시도했는데
그중 3차례나 그를 상대한 것이 바로 조진이었으며
이때는 사마의와 곽회도 조진의 밑에서 그의 지휘를 받았다고 합니다
1차 북벌은 조진이 부하들과 함께
조운이 이끄는 군대와 대치를 하고 있을 때
마속이 가정에서 장합에게 패하며 위나라의 승리로 끝났고
2차 북벌에서는 학소가 엄청난 방어를 보여주면서
보급에 문제가 생긴 제갈량이 결국 후퇴를 하게 되죠
2차 북벌 때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학소였지만
제갈량이 진창으로 진격해 올 것을 예상하고
학소를 그곳에 배치시켜 둔 것이 바로 조진이었다고 합니다
3차 북벌은 제갈량이 진창을 공격하는 척하며
다른 루트로 진식을 보내 무도와 음평을 점령해 버리면서 촉나라의 승리로 끝났고
조진은 이를 갈며 복수할 기회만을 노리다가
조예의 허락을 받아 사마의와 함께 촉을 공격하러 떠났지만
무려 한 달 동안이나 폭우가 쏟아지면서 어쩔 수 없이 철수를 하게 되죠
이때 병을 얻어 낙양으로 돌아온 조진은 얼마 후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https://blog.kakaocdn.net/dn/bq1FEN/btsHpOKRamp/YtoUj5NrCNo3ilGuDrhEFK/img.jpg)
3. 사마의
조진이 죽은 후 촉나라 전선의 총사령관이 된 인물은
바로 제갈량의 라이벌로 알려진 사마의였죠
제갈량과 사마의가 처음으로 격돌한 것은 4차 북벌이었는데
이때 첫 전투에서는 촉나라의 위연과 오의가
곽회와 비요가 이끄는 위나라군을 격파하면서 제갈량이 승리했으며
이후 제갈량이 군량을 얻기 위해 상규로 진출하자
사마의는 제갈량을 막기 위해 곽회를 상규로 보냈고
곽회가 제갈량과 위연에게 패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섰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사마의가 승리를 하면서
제갈량은 결국 상규를 포기한 채 기산으로 퇴각하게 되죠
이후 사마의는 군대를 대치시킨 채 시간을 끄는 지구전을 하려 했지만
부하장수들이 싸움을 피하려고 하는 사마의에게 불만을 품게 되면서
결국 버티지 못한 사마의는 제갈량과 정면승부를 펼치게 됩니다
전투의 결과가 촉나라군의 대승리로 끝나면서
상황이 촉나라에게 급격히 유리해지는 듯했지만
이때 촉나라의 2인자였던 이엄이 군량을 제때 보내는데 실패를 해버리면서
식량이 부족해진 제갈량은 결국 눈물을 머금으며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죠
4차 북벌이 끝나고 3년이 지난 후 시작된 5차 북벌에서는
제갈량이 북원과 양수 등의 지역을 노리고 진출했지만
곽회의 엄청난 활약으로 제갈량의 계획이 모두 실패했고
이후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사망하면서 촉군이 퇴각하게 됩니다
![](https://blog.kakaocdn.net/dn/chjLd9/btsHpLObEpQ/sh2GxHLo7KkZ9lndGkKn8k/img.jpg)
4. 하후현
제갈량이 죽은 후 사마의가 수도로 떠나면서
조진의 조카이자 하후상의 아들인 하후현이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되죠
그런데 당시 위나라의 실권자였던 조상은
군부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높이기 위해
촉나라를 먼저 치겠다는 무리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사마의는 이미 두 번이나 한중을 공격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기 때문에
무리해서는 안된다며 조상을 말렸지만
조상은 그의 말을 듣지 않은 채 하후현을 총지휘관으로 삼아 촉을 공격했죠
하지만 험난한 한중의 지리 탓에 위군의 군량을 싣고 가던
소와 말, 노새등이 죽으면서 제대로 군량이 보급되지 않았고
결국 굶주린 위군은 촉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때 위군은 유례없는 대패를 당한끝에 거의 전멸을 해버렸고
커리어에 심각한 오점을 남기게 된 하후현은
무수히 많은 위나라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게 되죠
이후 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조상이 목숨을 잃게 되자
하후현의 숙부인 하후패는 위협을 느끼고 촉나라로 항복을 하면서
조카인 하후현에게도 함께 촉으로 망명할 것을 권했지만
하후현은 그 제안을 거절한 채 수도로 돌아갔다가
몇 년 후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사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https://blog.kakaocdn.net/dn/bnovc4/btsHpNyttYw/nhmjGkh4GtTJYIhKATiIwk/img.jpg)
5. 곽회
오랜 시간 촉나라와의 전선에서 활약했던 곽회는
하후현이 수도로 돌아간 이후 대촉전선의 총사령관이 되었죠
하후현이 이끄는 위나라군이 대패했던 흥세전투에서도
일찌감찌 위험을 느끼고 병사들을 퇴각시키면서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구해냈던 곽회는
248년부터 강족과 연합해 북벌을 시도한
강유의 공격을 잘 막아냈을 뿐만 아니라
반격까지 시도하면서 오히려 촉군을 물리쳐버렸다고 합니다
249년에는 하후패가 촉나라에 항복한 이후 계속된 촉의 공격을
진태, 등애와 함께 잘 막아내며
죽기 전까지 성공적으로 촉의 북벌을 방어해 냈죠
![](https://blog.kakaocdn.net/dn/92VIA/btsHp38YeiO/AszbgNRCKODRUzkaLOqpAK/img.jpg)
6. 진태
곽회가 병으로 사망한 후 그 자리를 이어받은 것은
순욱의 외손자인 진태라는 인물이었습니다
255년 촉나라는 또다시 북벌을 시도했고
옹주자사인 왕경이 강유에게 역대급 대패를 당하면서
위나라는 옹주와 양주를 모두 촉에게 뺏길 위기를 맞게 되죠
하지만 이때 진태가 군사들을 이끌고 나타나 강유를 막아서면서
촉나라군은 결국 옹주를 포기하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의 공으로 당시 위나라의 실권자였던 사마소의 신임을 받게 된 진태는
승진을 한 끝에 중앙 조정으로 진출하는 등 출세를 보장받은 듯 보였죠
하지만 260년 6월 사마소가 위의 황제인 조모를 죽여버리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울분을 참지 못한 채 화병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7. 등애
263년 정서장군이었던 등애는 사마소가 촉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처음에는 그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정벌이 확정된 후 결국 그도 참전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검각에서 강유가 종회와 대치하고 있는 사이
등애는 음평의 산길을 타 넘으며 검각을 우회해서
촉으로 진입한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uLs5g/btsHqlOZWa6/gFRUTe2VQNpXsvdfJZm1b1/img.jpg)
수많은 사람들이 등애의 이 작전을 두고 무모하다는 평가를 내린 이유는
바로 등애가 등반을 시도했던 등산로가
사람이 다닐 수 있을만한 길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하죠
현대에 와서는 그나마 잔도까지 생겼기 때문에 많이 나아졌지만
그 당시에는 대군이 지나갈만한 잔도가 없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등애와 병사들은 무거운 갑옷을 입은 채로
식량보급도 제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험난한 낭떠러지로 이루어진 지옥 같은 산길을 통과해야만 했죠
심지어 산을 내려올 때는 경사가 너무 가팔라서
병사들이 몸을 모포로 둘둘 말고 굴러내려 갔다는 설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생 끝에 마침내 등산에 성공한 등애는
강유관과 면죽관을 점령한 후 촉나라 황제인 유선의 항복을 받는 데 성공하면서
촉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우게 되죠
여기까지는 좋았지만 이후 등애는
자신이 세운 공에 취한 것인지 위나라의 실권자인 사마소에게
내친김에 오나라까지 정벌하자는 무리한 주장을 하게 됩니다
사마소가 그런 중요한 나라의 일을 바로 정할 수는 없다며 거절하자
발끈한 등애는 "장수는 나라에 큰 이익이 되는 일일경우
허락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라는 말을 하며
사마소에게 의심을 받을만한 행동을 했죠
결국 종회와 호열 등의 인물이 등애가 모반을 하려 한다는 보고를 올리면서
등애는 즉시 체포되어 낙양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후 등애가 모반을 일으키려 한다는 보고를 올렸던 종회가
오히려 위나라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면서 등애에 대한 오해가 풀렸지만
종회와 같이 등애를 모함해 그를 체포했던 위관이
혹시라도 등애에게 보복을 당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평소 등애에게 원한이 있던 병사들을 설득해 등애를 습격하면서
등애는 아들인 등충과 함께 목숨을 잃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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