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교과서에서 알려주지 않는 북한군이 저지른 서울대병원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6.25 전쟁이 일어난 지 3일이 지난 1950년 6월 28일 서울에 진입한 인민군이 종로구에 있던 서울대 병원으로 쳐들어가 당시 병원에 있던 국군 부상병과 민간인 등 총 천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학살했던 끔찍한 사건이 있었죠
오늘은 대한민국 의료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사건중 하나로 꼽히는 서울대병원 학살사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된 이후 서부전선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된 대한민국 국군 부상병들은 서울대병원을 포함한 서울 시내의 여러 병원으로 나눠서 후송되어 있는 상태였죠
이 가운데 상당수가 심한 부상을 입은 중상자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쟁이 시작된 지 3일 만에 북한군이 서울까지 밀고 내려오자 서울에 남아있던 대다수 민간인들은 대혼란에 빠져 피난길에 올랐지만 환자가 있는 병원의 근무자들이나 경비병들은 차마 그들을 내버려 둔 채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게다가 너무 급하게 서울을 빼앗겨버린 상황이라 체계적인 환자 후송 같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죠
결국 병원을 빠져나갈 수 없었던 부상병들과 경비병들 그들을 치료하던 의료진, 그리고 일반 환자들과 가족들을 간병하기 위해 많은 민간인들이 서울대 병원에 남아있었습니다
6월 28일 아침, 조선인민군 육군 제9 땅크여단소속으로 짐작되는 병력들이 마침내 서울대병원까지 들이닥치게 되었죠
당시 병원 내부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 환자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병원 경비를 위해 남아있던 대한민국 육군 보병 1개 소대와 비교적 부상이 가벼운 80여 명이 소대장의 지휘하에 뒷산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전사하게 됩니다
국방부 블로그에 실린 기사에 따르면 당시 전투를 지휘한 소대장은 남 씨 성의 육군 소위 선임하사는 민 씨 성을 가진 중사였다고 하네요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국군을 전멸시킨 북한군은 먼저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병사들을 동원해 병원을 포위했고 이제 병동 안에는 저항이 불가능할 정도의 중상을 입은 부상병들과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비무장의 의료진과 민간인 환자들 그리고 그 환자들의 가족들만이 남아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북한군이 병원을 점령한 직후 한 육군 중좌가 "원쑤 놈들의 앞잡이들이 여기 누워있다!"라며 선동을 시작했고 머지않아 한국군 부상자를 몰살시키기 위한 학살극이 시작되었죠
처음에는 병동을 돌아다니며 침대와 바닥에 누운 환자들에게 마구잡이로 총을 갈기고 총을 맞고도 죽지 않은 사람들은 총검으로 확실히 죽였는데 이런 방법이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는지 나중에는 환자들을 침대 밖으로 끌어내어 병실 구석으로 몰아넣고는 한꺼번에 총을 쏴서 그들을 모두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렇게 북한군이 학살을 저지르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다른 병동에 남아있던 환자들은 급히 대피를 시도했지만 그들은 모두 북한 육군 경계병들에게 걸려 참혹한 최후를 맞았고 일부는 살해당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고 하죠
심지어 북한군은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는 환자의 가족들까지도 무참히 살해했습니다
이들은 한국군을 응징한다는 명분으로 이런 학살을 저질렀는데 그 과정에서 환자복을 입은 채로는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구분하는 것이 어려웠는지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들도 많은 수가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죠
안타깝게도 당시 상황이 워낙 급박하다 보니 피해자들의 정확한 숫자나 명단은 남아있지 않다고 합니다
황당한 것은 이들이 국군 부상병이 있는 곳만이 아닌 정신병동까지 난입해서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도 모두 죽였다는 것인데요
아마도 북한군들은 언뜻 보기에 몸에 상처가 없는 사람이 환자복을 입고 병상에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이들이 옷을 갈아입고 숨어있던 국군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하죠
그렇게 북한군은 세 시간 동안이나 부상병을 찾아다니며 죽이고 나서도 아직도 놓친 부상병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병원 안을 샅샅이 뒤져 부상병들을 찾아낸 다음 밖으로 끌어낸 후 한꺼번에 그들에게 총을 쏘고 총검으로 확인사살까지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도 일반 환자나 가족 등 민간인이 다수 살해당했다고 하죠
이렇게 몇 번에 걸친 학살과정을 거치고 나서도 병원 안에 남아 있는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을 악착같이 잡아내서는 보일러실로 끌고 가서 10톤의 석탄 더미 속에 그대로 생매장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학살을 당한 시신들은 한여름 병원 마당에 쌓인 채로 20일 동안 방치되면서 병원에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고 하죠
마침내 더 이상은 그 냄새를 못 견디게 된 북한군들은 시신들을 병원 앞 큰길인 창경궁 앞 길에다가 쌓은 뒤 기름을 붓고 불로 태워버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살해된 희생자들은 정확한 숫자를 알 수 없으며 우리 측의 기록에는 부상병 100여 명으로 되어 있는데 서울대병원에서 세운 추모비에는 1,000여 명으로 되어있다고 하죠
전시라 제대로 기록이 정리되지 않은 탓에 편차가 매우 크기 때문입니다
환자들이 죽은 뒤 병원은 북한군 부상병들의 후송 기지로 쓰였고 3개월이 지나서 서울을 다시 되찾은 후에야 이 끔찍한 학살극의 참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죠
뿐만 아니라 북한군은 국군에 의해 밀려나기 직전에 또 한차례 학살극을 벌인 정황까지 드러나면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두 번째 학살극은 북한군에 대한 협조를 거부한 사람들 그리고 북한 정부에 부정적인 민간인과 언론인 등이 그 대상이었다고 하는데 그 숫자가 무려 백여 명 정도나 되었다고 하네요
게다가 당시 서울에서 근무하던 의사와 간호사, 군의관, 의무병 중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북한군에 납치된 후 강제로 북한군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해 동원되었고 그들 중 저항하던 일부는 서울 시민들에게 겁을 주기 위한 본보기로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참혹하게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살아남았던 사람들 또한 북한의 후방 군 병원에 동원한다는 명목으로 강제로 북에 끌려갔는데 이 과정에서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의료진들은 총살해 버리는 등의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고 하죠
당시 서대문에 있던 적십자병원에도 많은 수의 한국군 부상병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서울대병원처럼 병원을 지키는 경비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곧바로 학살이 일어나지는 않았고 느긋하게 병원을 점령한 북한군이 "동무들은 죄가 없으니 치료가 끝나면 다 집으로 보내주겠다"라는 식으로 안심을 시킨 후 남아있던 한국군 군의관에게 계속 부상병들을 돌보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장 그날 오후가 되자 갑자기 국군 부상병들에게 북한군 부상병들을 위해 침대를 비워주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일부 병사들은 여기 그대로 있으면 학살될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느끼고는 그 길로 탈출을 시도해 성공했다고 하는데요
이 병사들이 탈출한 이후에 병원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곳에 남아있던 부상병들은 모두 학살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이 두 곳 이외에도 서울 시내 여러 곳에 있던 병원들과 병원 외에 부상병들을 데리고 있던 교회 등에서도 마찬가지로 북한군에 의한 학살이 벌어졌다는 증언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정확한 희생자들의 명단과 숫자는 파악되지 않았다고 하죠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비록 전쟁 중일지라도 상대편의 부상병들이나 민간인에 대한 공격은 금지되어야 하기 때문에 만일 이게 정상적인 전쟁이었다면 북한군은 포로로 잡은 부상병들을 보호하고 오히려 그들에 대한 치료를 보장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애초에 적화통일을 성공하면 어차피 자신들의 체제에 위협이 될 반공주의자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작정이었던 북한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죠
때문에 포로들을 설득하면 오히려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음에도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그들을 모두 죽여버린 것인데요
이런 잔인한 행위를 북한군이 태연하게 저지를 수 있었던 데는 당시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주력이 소련군 출신이 주축이 된 3사단과 4사단, 9 전차여단이었던 탓이 큰 것으로 보입니다
김일성은 의도적으로 서울 점령이라는 공을 몰아주기 위해서 이들을 서울 공격의 주공으로 삼았는데 3사단의 경우 병사는 북한에서 징집한 신병들이었지만 장교들은 대부분 2차 대전 중 소련군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으며 4사단은 아예 한 개 연대가 중공군 출신 연대였던 데다 군관 중에서도 소련군 출신자가 많았다고 하죠
9 전차여단의 경우 소련에서 전차병 교육을 받고 돌아온 인물들이 핵심이었고 소련과의 연대를 원하던 김일성은 이들에게 큰 공을 세우게 한 뒤 이들을 선전용으로 사용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눈에 띄는 행위를 하도록 오히려 권장했다고 합니다
서울대병원 내에는 당시의 희생자들을 위한 '이름 모를 자유전사의 비'가 세워져 그 당시의 참극을 전해주고 있는데요
한국 최고 병원이라는 서울대병원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학살 사건임에도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인지도가 매우 낮은 사건이라고 합니다
과거 반공과 남북 간의 체제 대결을 강조하면서 북한군의 만행과 북한 체제의 잔혹성을 널리 선전하던 군부정권 시절에도 이 사건은 이상하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죠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부상자나 민간인 의료진에 대한 학살을 저질렀으니 북한의 야만성과 잔혹성을 알리기에 아주 좋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교과서는 물론 언론이나 다른 매체에서도 거의 다루지 않았는데요
그렇다 보니 일반인들은 이 사건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현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나마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이 사건에 대해 접하면서 어느 정도 아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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