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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스기야마 하지메. 중국은 1달, 미국은 3달만에 점령 가능하다고 천황 앞에서 개구라 쳤던 개폐급 오물

by 사탐과탐 2022.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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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야마 하지메는 천황 앞에서 말도 안되는 개구라를 쳤던 일본 3대 오물 중 한 명입니다
그는 무슨 자신감으로 헛소리를 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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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일본에서 3대 오물이라고 불리는 인물들 중 마지막 남은 하나인 스기야마 하지메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무타구치 렌야가 워낙 이상한 짓을 많이 한 덕분에 한국에서는 그의 명성이 렌야에게 가려지며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무타구치 렌야나 도미나가 교지 못지않은 꼴통으로 과거 일본의 전범들이라면 무조건 옹호해주는 현대 일본의 극우세력들마저도 스기야마 하지메를 비롯한 삼대오물이라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고 하죠

 

스기야마는 1880년 일본의 후쿠오카에서 태어났습니다

24세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러일전쟁에 참전하게 되죠

하지만 1904년 10월 8일의 사하 전투에서 얼굴을 다쳤는데 이 부상 때문에 이후부터 오른쪽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전쟁이 끝난 후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덕분에 일본 육군에서 가장 큰 파벌에 속하면서 그에게 출세길이 열리게 되죠

필리핀과 인도차이나 지역에서 외교 및 첩보 활동을 하며 경력을 쌓아나간 스기야마는 1920년대에는 일본 육군성 항공과장을 지냈으며 일본 육군의 청년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2.26 사건 때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서 내란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아 육군 장관에 올랐습니다

 

그는 중일전쟁의 계기가 된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한 달의 시간만 있으면 중국 전역을 정복할 수 있다"라는 헛소리를 하며 중일전쟁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였는데요

하지만 한 달이면 중국 전체를 점령할 수 있다던 스기야마의 말과는 다르게 상하이 사변에서 적잖은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상하이를 점령하는 데만 3개월이라는 시간을 소비했고 정규군이 아닌 예비역 중심으로 급히 소집된 일본군은 규정을 지키지 않은 채 닥치는 대로 학살과 약탈을 저지르면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함락한 후에 난징 대학살 사건을 일으켰죠

 

덕분에 독일이 중국과 일본을 화해시키려고 시도한 트라우트만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고 일본의 내각총리대신인 고노에 후미마로는 앞으로 중화민국 정부와 교섭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그들을 말살해버리겠다는 고노에 담화를 발표해버렸습니다

그때까지도 일본에게는 중국을 얕잡아보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수도만 함락시키면 즉시 그들이 항복할 줄 알았지만 장제스는 중화민국의 수도를 충칭으로 옮긴 후 그들의 주력부대를 우한으로 옮기고 필사적으로 일제에 저항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일본에서는 처음 예상과 다르게 중국인들이 끈질기게 저항하자 미개한 지나인들이 감히 일본에 대항한다고 화를 내며 침략을 계속했는데요

하지만 중국에 남아있던 마지막 대도시인 광저우와 우한을 함락시켰는데도 중국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그렇게 전쟁은 계속 길어졌습니다

그 와중에 참모총장이었던 스기야마는 미국과도 전쟁을 일으킬 계획을 세웠고 고노에 총리로부터 계획에 대해 보고받은 천황 히로히토는 경악하며 스기야마를 즉시 불러들였죠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히로히토의 물음에 스기야마는 "진주만 공습이 성공하면 미국은 3개월 만에 태평양의 제해권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라며 자신만만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에 히로히토가 미국과 전쟁이 벌어지면 어느 정도만에 미국을 정리할 수 있겠냐고 묻자 스기야마가 3개월 정도면 미국의 남부지역은 확실히 정리할 수 있다고 대답했죠

 

하지만 히로히토는 스기야마의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면서 "자네는 중일전쟁 때도 1개월 정도면 중국을 정리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는데 현실은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직도 정리를 못하고 있지 않나!"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천황의 분노를 본 스기야마가 벌벌 떨면서 중국은 워낙 땅이 넓어서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변명을 하자 히로히토는 중국이 그리 넓다면 태평양은 더 넓을 텐데 대체 무슨 확신이 있어서 3개월 만에 점령이 가능하다고 장담하는 거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고 스기야마는 그저 고개만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하네요

 

그리고 히로히토가 과거 일본 해군의 모의 훈련 때도 제대로 성공하지 못했는데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들이 태평양에 있는 그 많은 섬에 어떻게 상륙작전을 신속하게 할 수 있겠냐면서 의문을 표하자 스기야마는 그동안 연습을 많이 했으니 훈련과는 다르지 않겠냐는 식으로 변명하다가 분노한 히로히토에게 쌍욕을 얻어먹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히로히토는 왕으로서 기초적인 상식 수준의 공부만 한 아마추어에 불과했는데 수십 년 경력의 참모총장이라는 인물이 아마추어보다 못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이 있은지 몇 달 후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시작했고 결과는 여러분도 알다시피 일본의 참패로 끝나게 되죠

 

스기야마의 업적 중 유명한 것 중 하나는 바로 무타구치 렌야의 무모하기 짝이 없는 임팔 작전을 허가해 준 것인데요

대부분의 참모장과 작전과장이 무타구치의 작전을 보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작전이 아니라며 격렬히 반대했지만 스기야마는 계획을 세운 무타구치 렌야와 데라우치가 자신과 같은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교 출신 파벌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계획서를 대충 훑어보고 허가를 해줬다고 하죠

 

멍청하기로 소문난 도조 히데키도 임팔 작전의 성공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확신했으며 히로히토는 신하들이 모두 찬성했다면 자신 역시 따르겠지만 이게 정말 현실적으로 가능하긴 한 작전이냐며 계속해서 물어봤다고 합니다

그렇게 스기야마와 무타구치가 이뤄낸 환장의 콜라보 덕분에 임팔 전투에서 10만 명이나 되던 남방 전선의 일본군 대부분이 날아가 버리고 1만 5천 명만이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됐죠

 

그렇게 스기야마 하지메를 비롯한 3대 오물의 빛나는 활약 덕분에 패망한 일본제국은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하게 됩니다

스기야마는 그해 9월에 자신이 무능해서 패전했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신의 부인과 함께 나란히 목숨을 끊었죠

 

패전 후에도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던 무타구치 렌야와 다르게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탓에 그나마 삼대 오물 중에서는 조금 나은 평가를 받는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스기야마 하지메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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