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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천비해전. 청나라가 서구열강에 얕보여 아편전쟁의 원인이 된 사건

by 사탐과탐 2024.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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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가 서구열강에 얕보여 아편전쟁의 원인이 된 사건 천비해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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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편전쟁은 1839년부터 1842년까지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왜냐면 이 전쟁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 문화의 충돌이자 근대 국제 질서가 만들어지는데

큰 영향을 미쳤던 사건이기 때문인데요

 

18세기까지만 해도 청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 중 하나였죠

특히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가 다스리던 시기는

청나라의 전성기라 불릴 수 있을만한 시대였습니다

때문에 청나라를 동경한 유럽 사람들이 청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따라 하는

'시누아즈리'라는 유행이 생겨날 정도였죠

 

유럽에서 어느 정도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청나라의 과거시험과 관료제도가

이상적인 통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 같은 물건들은

유럽 부자들이 꼭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775년쯤부터 청나라는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죠

정부가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높은 사람들이 사치를 즐기고 뇌물을 받았으며

여기저기서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인데요

 

게다가 황제에게만 모든 권력이 집중되다 보니

관리들은 새로운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고

과거시험으로 뽑힌 관리들은 점점 더 옛날 방식만 고집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새로운 문제가 생겼을 때 잘 대처하지 못했고, 결국 청나라의 힘이 약해졌죠

 

황제를 비롯한 높은 관리들은 사치를 심하게 부렸고

뇌물을 주고받는 일이 당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부정부패 때문에 나라의 돈이 줄어들고

백성들은 정부를 믿지 않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 결과 전국 곳곳에서 청나라를 무너뜨리자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1796년부터 9년 동안 계속된 백련교도의 반란은

청나라가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잘 보여줬죠

이 반란은 결국 진압되었지만 청나라 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고

나중에 더 큰 반란이 일어날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요

 

그렇게 청나라가 안에서부터 점점 약해지는 동안

서양 사람들이 청나라를 보는 시각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18세기까지만 해도 청나라를 이상적인 나라로 여겼는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오히려 청나라를

구시대적이고 덜 발전한 나라로 취급하기 시작했죠

 

청나라가 퇴보하는 동안 서양에서는

오히려 과학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산업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인데요

또한 예전보다 더 청나라의 실상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면서

그들이 이전에 가졌던 환상이 깨진 것도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들의 변화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쳤죠

 

청나라와 서양 나라들 특히

영국과의 무역 갈등은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757년 청나라는 '방범외이장정'이라는 법을 만들어

광저우에서만 제한적으로 무역을 허용했고

이 때문에 서양 상인들은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죠

이 정책은 청나라의 전통적인 중화사상에 따른 것으로

외국과의 거래를 최소화하고 자기 나라의 문화와 체제를 지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영국은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 여러 번 사절단을 보냈지만

매카트니 사절단(1792년)과 애머스트 사절단(1816년)

네이피어 사절단(1834년)이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죠

 

이 사절단들은 청나라와 더 많은 무역을 할 수 있는 외교 관계를 맺으려고 했지만

청나라가 완고하게 거절을 하면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는데요

이렇게 계속 실패하자 영국은 더 이상 대화로는

청나라의 문을 열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무력을 사용해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19세기 초, 청나라와 영국 사이의 무역은 매우 불공평한 상태였는데

놀랍게도 청나라에 유리한 방향이었죠

1781년부터 1810년까지 청나라로 들어온 은은

무려 4,200만 냥이나 되었는데

이는 당시 세계에서 유통되던 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엄청난 양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런 상황이 생긴 이유는 청나라 물건이

다른 나라의 물건들에 비해 저렴했다는 것과

영국에서 중국 차가 엄청나게 인기를 끈 덕분이었는데요

 

청나라는 많은 인구를 바탕으로 한 가내 수공업으로 인해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내놓는 놀라운 가격 경쟁력을 자랑했고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중국 차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일반 가정의 월급 중 5퍼센트를 차를 사는 데 썼을 정도였죠

 

차 외에도 도자기나 비단 같은

청나라의 사치품들이 영국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이런 사실 때문에 무역 불균형이 더 심해졌습니다

 

이런 상황은 영국의 동인도 회사에 큰 타격을 주었고

이 무역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해

영국이 선택한 것이 바로 아편이었죠

인도의 벵골 지방에서 생산한 아편을 청나라로 팔기 시작한 것인데요

 

아편은 중독성이 강해서 한번 팔고 나면

이후로도 계속해서 수요가 생길 수밖에 없는 상품이었기 때문에

영국은 이를 통해 무역 적자를 해결하려고 했죠

 

당시 청나라는 오랫동안 평화로웠던 탓에 사회 분위기가 느슨해져 있었고

아편이 얼마나 해로운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아편은 청나라 안에서 급속도로 빠르게 퍼져나갔고

머지않아 심각한 사회 문제를 일으키게 되죠

 

아편 중독자가 급격히 늘어나자

중국 내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을 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 질서가 흐트러지는 등 여러 문제가 생겼습니다

때문에 1839년, 청나라의 특별 관리인 임칙서는

광저우에서 강력한 아편 단속을 시작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는 외국 상인들로부터 21,000여 상자의 아편을 빼앗아 없애고

앞으로 아편을 들여오면 내외국인 상관없이

사형에 처해버리겠다는 강한 경고문을 발표했죠

 

이는 청나라 정부가 아편 문제를

강하게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행동이었지만

동시에 영국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중에서 눈에 띄게 청나라에 맞선 인물이

바로 영국 측 무역감독관이었던 찰스 엘리엇이었죠

 

그는 임칙서로부터 각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받은 영국 상인들에게

각서 서명을 거부하기를 권한 후 그들을 데리고 마카오로 피신했습니다

이후 영국 정부에 편지를 보내 청나라가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강제로 압수하고 폐기했다고 알렸죠

 

그리고는 무력을 써서라도 상인들의 재산을 찾아주고

자유롭게 사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광저우의 큰 영국 무역회사인 '자딘 메디슨'이 나섰죠

자딘과 메디슨이라는 두 사람이 직접 영국에 가서

국회의원들을 만나 영국 해군을 보내달라고 로비를 한 것입니다

 

왜냐면 자딘 메디슨은 당시 아편 밀수로

가장 많은 돈을 번 영국 회사였기 때문이죠

한편 엘리엇은 영국 상인들과 함께 마카오에서 영국의 지원을 기다렸습니다

 

임칙서가 계속해서 각서에 서명을 하라고 요구를 하면서

다른 나라들은 결국 임칙서의 요구에 따랐지만

엘리엇만은 끝까지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계속 버텼죠

그러자 임칙서는 마카오로 가는 모든 물건의 공급을 막았고

결국 엘리엇과 영국 상인들은 마카오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래도 그들은 각서에 서명하지 않고 홍콩으로 건너갔죠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 술에 취한 영국 수병 두 명이

청나라 사람과 싸워 그를 죽여버리는 사고가 일어났는데요

임칙서는 즉시 두 수병을 넘겨달라고 했지만

엘리엇은 그 요구를 거절하고 그들을 영국으로 보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화가 난 임칙서는 홍콩 주변을 더 철저히 봉쇄해 버렸죠

그러자 시간이 지나면서 불만을 갖는 영국 상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몇몇 영국 상인들이 각서에 서명을 하기 위해 광저우로 가려고 했죠

하지만 엘리엇은 이들이 탄 배를 가로막은채

군함으로 경고 사격까지 하면서 그들을 위협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임칙서는 그 영국 상인들을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에

청나라 수군에게 위협사격을 하는 영국 군함을 물리치라고 명령했죠

그렇게 청나라의 배 29척과 영국배 2척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지만

청나라 수군이 얼마나 약한지 알고 있었던 엘리엇은

자신 있게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839년 11월 3일 두 나라 사이에 해전이 시작됐는데

이 전투는 몇 시간도 안 걸려 끝났다고 하는데요

청나라 배 29척 중 26척이 침몰하거나 크게 부서졌고

영국 배 2척은 전혀 부서진 곳이 없었다고 하죠

이 전투가 바로 '천비해전'입니다

 

이렇게 천비해전이 영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면서

영국과 청나라의 힘 차이를 잘 보여주었고

결국 머지않아 아편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죠

역시나 예상대로 아편전쟁은 영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습니다

 

영국군은 광저우와 샤먼, 닝보, 상하이 등

청나라의 주요 항구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했고

마침내 난징까지 진출하며 청나라 정부를 굴복시켰죠

그렇게 1842년 8월, 청나라는 굴욕적인 남경조약을 맺게 됩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청나라는 홍콩을 넘겨주고 5개 항구를 개방하며

영사재판권을 인정하고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죠

이로 인해 청나라는 사실상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게 되고

이후 '중국의 백 년간의 굴욕'이 시작됩니다

 

남경조약은 이후 서양 강대국들이

청나라와 맺은 불평등한 조약의 본보기가 되었고

이를 통해 청나라는 서양 강대국들의 놀이터가 돼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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