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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수문제. 자신은 역사상 최고의 성군, 아들은 역사상 최악의 폭군

by 사탐과탐 2024.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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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역사상 최고의 성군, 아들은 역사상 최악의 폭군 아들에게 죽임당한 수나라 황제 수문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호부견자라는 말을 아시나요?

'호랑이 아버지에 개자식'이라는 뜻이죠

 

아버지는 호랑이처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아들은 아버지 만큼은 안된다라는 말입니다.

 

그런말이 딱 들어맞는 인물이 있는데요

 

바로 수나라의 초대황제인 '수문제' 입니다

 

수문제는 굉장히 훌륭한 정치를 펴

그가 나라를 다스린 시기의 태평성대를 가르켜

'개황성세'라고 부르고 있죠

 

이런 호랑이 수문제의 아들이 바로 개자식이었습니다

 

그 아들은 중국 3대 폭군 중 한명으로 일컬어 지는 수양제이죠

 

오늘은 수나라를 세우고

훗날 중국에 만들어진 나라들에도 영향력을 끼칠정도의 정치 기틀을 만든

수문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의 이름은 양견으로

아버지는 양충이라는 인물이었는데요

 

원래 선비족 가문이었지만

훗날 서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로부터 양씨성을 하사 받았고

이후 양씨성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리고 양충은 북주의 칭호 중 가장 높은 '주국대장군' 직위에 까지 올랐고

수국공에 봉해졌으며 재상급 직책이던 '대전의'까지 맡은

엄청난 권력가였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 덕에 양견은 손쉽게 높은 관직에 오를수 있었죠

 

하지만 양견은 수나라를 세우기 전까지

목숨이 위태로웠던 많은 난관들이 있었는데요

 

양견은 어릴적부터 풍채가 남달랐기에

그것 때문에 생긴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날 양견을 보고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느낀 북주의 명제가

은밀히 관상가를 불러 양견이 어떤 사람인지 보라고 지시를 내렸죠

 

만약 양견이 북주를 무너트릴 정도의 위험한 인물이라면

더 크기전에 미리 싹을 잘라놓을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관상가는 양견을 만나러 갔다가

그가 보통 인물이 아님을 느꼈고

양견에게 다가가 "당신은 천하의 황제가 될 사람 입니다

하지만 많은 피를 보고 난 뒤에야 그리 될것이니 내말을 잊지마십시오" 라고 말한뒤

다시 명제에게 돌아가

양견은 잘 돼봐야 대장군 정도에 불과한 인물이라고 말했던 것이죠

 

관상가가 거짓말을 해주었던 덕에 양견은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고를 들은 명제는 안심했지만

양견의 예사롭지 않음을 느낀 사람은 또 있었습니다

 

바로 북주의 대신이던 독고신이었죠

 

독고신은 양견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자신의 딸인 독고가라를 시집 보냈다고 합니다

 

사실 독고신의 첫째딸은 명제의 아내였고

넷째딸은 당국공 이병에게 시집을 보냈는데

이병과 독고씨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 바로 당고조 이연이죠

 

그만큼 독고신은 북주의 황제의 장인이자

훗날 수나라를 세우는 양견의 장인이자

당나라를 세우는 이연의 외할아버지 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독고가문이 제일 성공한 집안이 아닌가 싶기도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어쨌든 대귀족 출신인 독고가문의 힘을 얻게된 양견은

정치적으로 확고한 입지를 다질수 있었으며

이후에는 군대를 지휘해 북제의 군대를 격파하면서

가장 높은 칭호이던 '주국대장군' 직위까지 오르게 되고

그렇게 양견은 호랑이 등에 날개 단듯 승승장구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명제와 무제 세상을 떠나고

선제 우문윤이 황위에 오른뒤에

또 양견의 목숨을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하죠

 

양견은 자신의 딸을 선제에게 시집보낸뒤

황제의 장인이 되자 이후 북주의 실권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위인 선제는 어디 먼곳에 갈때마다

양견에게 도성을 맡길정도로 그를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선제는 사치와 폭정을 일삼고 백성들을 잔인하게 다뤘던 반면

양견은 백성들에게 어질게 대하며 인심을 얻고 있었기에

점점 양견에게 위협을 느낀 선제는

양견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었죠

 

그리고 어느날 양견을 궁으로 부른 선제는

병력들을 매복시킨 뒤 자신이 양견을 죽이라고 명령하면

그때 튀어나와 그를 죽여버리라고 지시를 내렸던 것입니다

이후 양견이 궁궐에 도착하자

궁궐내에 살기가 가득찬걸 느낀 양견은

선제의 의중을 알아차렸죠

 

선제는 양견이 무례한 모습을 보이게 하기 위해

선넘는 짓까지 하면서 그를 도발했지만

양견은 선제의 자극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렸습니다

 

그렇게 다행히 아무일없이 그 사건은 마무리 되었죠

 

이후 580년, 21세의 젊은나이로 선제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이던 정제가 고작 8살의 나이로 즉위했는데

나이가 너무 어렸던 탓에 이후 양견이 국정을 이끌어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양견은 수왕(隨王)이자 승상이자 섭정을 하면서

북주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후 양견은 지방에 있던 다섯명의 우문씨 왕들을 궁으로 유인해

그들의 병권을 빼앗아 버렸는데

이에 화가 난 조왕 우문초는 연회를 열어 양견을 부른뒤

술을 먹이고 죽여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양견은 조왕과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이상한 낌새를 느낀 양견의 부하 원주가

양견에게 느낌이 이상하다며 자신이 막을테니

얼른 이곳을 빠져나가라고 말했고

그렇게 양견은 암살의 위협에서도 벗어날수 있었죠

 

이후 양견은 조왕 우문초와 등왕 우문유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해버렸고

나머지 세명의 우문씨 왕들도 차례대로 제거해

북주의 황족이던 우문씨를 완벽하게 제압할수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것은 정제의 제위를 빼앗아 황위에 오르는 일 밖에 없었지만

그는 손자뻘이던 정제를 폐위시키는것을 주저하고 있었죠

 

그때 아내이던 독고가라는 남편에게

"당신은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처지이니

이제 내릴수 없는 상황입니다" 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를 본 양견은 마침내 결심을 하게 되었고

결국 정제는 제위를 선양한다는 조서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양견은 다른 찬탈자들처럼 예의상 선양을 세번 거절한뒤

드디어 황제(수문제)로 즉위했고 국호를 '수(隋)' 라고 지었죠

 

황제로 즉위한 수문제는 과거 관상가가

"많은 피를 보고난 이후에야 천하가 안정이 될 것' 이라고 말한것 처럼

자기에게 양위한 정제는 물론이고

북주의 황족인 우문씨를 모조리 다 죽여버리는 잔혹함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서쪽으로의 진출을 위해 장안을 도읍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대륙 통일 사업에 뛰어 들었죠

 

그리고 583년에는 북제의 잔당을 소탕했고

587년에는 후량을, 그리고 589년에는 진나라를 멸망 시키고

오랜기간 분열되어있던 천하를 통일했습니다

 

그 뒤로도 수문제는 뛰어난 정치능력을보여주는데

과거제를 실시해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고

귀족들의 힘을 약화 시켰죠

 

또한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는 제도인 균전제를 실시하고

거기다가 백성들의 세금까지 깎아 주면서

백성들이 더 나은 삶을 살수 있게 살펴주었습니다

 

그리고 수문제는 황하와 장강을 연결시키는 대운하를 건설하려고 했는데요

 

대운하 공사를 시작하고나서 얼마 안돼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자 곧바로 건설을 중단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 역시 소박하며 근검절약 하는 삶을 살았고

날이 가면 갈수록 수나라 국고는 풍족해 졌던 것이죠

 

그리고 태형, 효수형, 거열형 같은 혹형들을 폐지하기도 했고

개황율령반포, 구품중정제, 선거제, 조용조제도 실시 등

많은 관제도 정비했으며

이 조용조 제도는 훗날 당나라의 조세 징수 체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거기다가 그가 만든 정치 제도는

훗날 당나라 율령제의 기초가 되기도 했으며

이후 생긴 여러 국가들과 주변 동아시아 나라들의

정치 제도에 기반이 되었을 정도로

훌륭한 제도를 실시했죠

 

이런 수문제의 정치는 훗날 당태종때에 언급되는데

당태종이 신하들에게 수문제의 정치에 대해 물으니

신하들은 '위사전찬(衛士傳餐)' 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는 혼자 모든일을 처리하다보니 식사할 시간도 없어서

일하는 곳으로 식사를 가져오라고 했다는 뜻이라고 하죠

 

그만큼 그는 근면성실함을 잘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수문제 시절에는 재미있는 일화도 많은데요

 

어느날 왕가라는 사람이 70여명의 죄수들을 장안으로 압송하고 있었죠

 

그런데 죄수들이 너무 힘들어 하는걸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

죄수들의 몸에 걸친 칼과 쇠사슬을 풀어주고나서

몇월 며칠까지 장안으로 오라고 하고 죄수들을 보내준것입니다

 

만약 죄수들이 도망가기라도 하면 자신의 목이 10개라도 모자랄 판이었죠

 

그런데 모두 약속한 시간에 죄수들이 한사람도 늦지 않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수문제는

그 죄수들에게 다음해 가을에 다시 장안에 모이라고 명령하고

모두 돌려보냈다고 하죠

 

그리고 이듬해 약속한 날짜에 모두가 모이자

수문제는 크게 기뻐하면서 죄수들의 죄를 사면해주었고

왕가의 벼슬도 높여주었다고 합니다

 

또 하루는 관중지방에 대기근이 들자

수문제는 신하를 보내 백성들이 뭘먹고 살고 있는지 조사하도록 했죠

 

그러자 신하가 들고온것은 콩껍질과 쌀겨를 섞어 만든 떡이었는데

신하는 백성들이 이런걸 먹고 목숨을 연명하고 있다고 보고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수문제는 자신이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하니

백성들이 고통받고 있다며

자신의 밥상에서도 반찬을 줄이고 오랜기간 술과 고기도 먹질 않았다고 하죠

 

그만큼 백성들의 삶을 생각해주는 훌륭한 성군이었던 것입니다

 

그로인해 국고가 가득찼을 정도로 나라는 풍요로워졌으며

인구수도 선양을 받기 전보다 약 2배 만큼 많아졌을 정도였죠

 

그러나 이런 수문제에게도 결점은 있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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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안정이 되자 긴장이 풀렸는지 점점 나랏일을 소홀히 하기 시작했고

나이가 들수록 관리들에 대한 의심이 깊어져

툭하면 관리들을 매질 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자신이 기분이 좋을 땐 신하들에게 상을 주고

기분이 나쁠땐 갑자기 벌을 주는등 이상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황태자 책봉 문제도 그를 괴롭혔는데

처음엔 장남이던 양용을 태자로 책봉했지만

양용이 주색에 빠져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는 등 악행을 저지르자

평소 양용을 싫어한 문헌황후가 수문제에게 태자를 바꾸자고 주청했던 것이죠

 

이에 결국 양용은 태자에서 폐위되고

차남이던 양광이 태자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 양광이 바로 호부견자의 주인공이자

중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 되는 '수양제' 이죠

 

그리고 602년, 문헌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수문제는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었고

이후 정신이 피폐해져 병에 걸려 눕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태자이던 양광의 진짜 모습을 보게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수문제가 병에 걸려 생사를 헤맬때

선화부인과 용화부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문제 곁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죠

 

그러자 수문제는 그 둘이 쉬지않고

시중을 드는 모습을 보고 조금 쉬라고 말했는데

선화부인이 휴식을 취하러 자신의 거처로 가는 도중

태자 양광을 만났고

양광은 평소 아름답던 선화부인을 눈여겨 보고 있었기에

대담하게도 아버지의 후궁이던 그녀를 겁탈하려 한것입니다

 

이에 겨우 도망친 선화부인은 옷매무새가 헝클어진 채로 수문제에게 달려가

태자가 자신에게 이렇게 했다고 말했는데

이에 격분한 수문제는 "그 짐승만도 못한 놈이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내가 황후의 말을 들은 것이 큰 실책이었구나!" 라고 소리친뒤

양용을 다시 태자로 삼으려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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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실을 알게된 양광은 쿠데타를 일으켜 병력을 동원해

자신에게 협력하지 않는 신하들은 모조리 죽이고 황궁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근위장이던 우문지급을 양용에게 보내

양용의 목숨마저 빼앗아버렸죠

 

이후 수문제는 아들이던 양광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백성들에 칭송받던 성군 수문제가

아들 잘못 둔 죄로 받게 된 비참한 최후였죠

 

그런데 사실 그의 죽음에는 의문점이 여러가지가 있는데요

수문제의 죽음이 여러기록에 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업약기>에는 독살되었다고 기록되어있고

<통력>에는 장형이 문제를 죽일때 그 피가 병풍에 튀었다 라고 적혀있으며

<수서>에는 노환으로 병들어 죽었다고 되어있기 때문이죠

 

거기다가 <자치통감>에는 '안팎에서는 자못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부황 시해설을 암시하고 있는것 같기도 합니다

 

양광이 정말로 수문제를 살해했는지는 약간의 의문이 드는건 사실이지만

양광은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을때도

술과 고기를 먹으며 어머니의 죽음을 기뻐했을 정도로

싸패기질이 다분한 인물이었기에 시해를 했을수도 있을것 같긴하죠

 

어쨌든 수문제는 360여년이나 분열되어 지속되고 있던 혼란을 잠재우고

현재 중국의 기틀까지 다졌던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문제 시기의 태평성대를 '개황성세' 또는 '개황의치' 라고 부르는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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