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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폭군 간신 탐구

클레오파트라 7세. 로마의 최고 권력자들을 이용해 권력유지를 하다가 결국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요부, 마녀라 불린 여인

by 사탐과탐 2022.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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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권세 유지를 위해 로마의 최고 권력자들을 이용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요부, 마녀라 불린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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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에는 과거 수천년 전부터 무수히 많은 왕조가 있었죠

또한 군주를 왕이라 부르지 않고 파라오 라고 부르는데요

 

이집트 역사에서 파라오라는 칭호를 마지막으로 쓴 왕조가 바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입니다

이 왕조는 300여년만에 멸망하면서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죠

 

오늘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최후의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 7세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클레오파트라 7세를 마지막으로 '독립 국가 이집트의 군주' 로서의 파라오는 완전히 명맥이 끊겼죠

이후에도 이집트를 지배하는 로마 제국의 황제를 이집트에선 파라오라고 부르기도 했고 즉위할때도 이집트 파라오식으로 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의미 일뿐이었습니다

그 이후에 이집트를 다스린 군주들은 파라오 라는 칭호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죠

 

마지막 파라오 클레오파트라 7세의 생애는 정말 어떤 소설이나 드라마보다 흥미롭고 스펙타클 하기도 합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딸로 태어났는데요

기원전 5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당시 이집트의 근친 결혼 전통대로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해 이집트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이집트는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져 멸망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었죠

이미 선대 파라오인 프톨레마이오스 4세때부터 아버지인 12세때 프톨레마이오스까지 파라오들의 정치능력이 떨어지고 무능한 모습을 보이면서 측근들의 부정부패가 만연했었고 적들의 침략과 잦은 반란으로 인해 이집트의 상황은 이미 되돌리기엔 늦은 그런 상태였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로마와 동맹을 맺고난 뒤부터 로마의 정치적 개입이 심해지다보니 이집트의 내부 상황은 더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나라 상황이 그렇다보니 클레오파트라 7세의 삶 역시 평탄하지는 않았던 것이죠

남동생이자 남편인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함께 왕좌에 오른 그녀는 원래부터 야망이 컸기 때문에 남동생을 정치에서 배제시켜버리고 혼자 모든 권력을 독점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동생과의 권력싸움에 패배해 결국 먼 지방으로 쫓겨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정처없이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날 로마의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당시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이집트 왕궁에 묵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죠

그러자 그녀는 카이사르를 유혹해 빼앗긴 권력을 다시 되찾아 오려는 생각을 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쫓겨난 신세에 삼엄한 경계를 뚫고 카이사르를 만나기 위해선 특단의 계책이 필요했죠

이에 클레오파트라 7세는 엄청 크고 고급스러운 양탄자를 준비한 뒤 그 위에 누워서 심복에게 자신의 몸을 양탄자로 둘둘 말라고 명했습니다

그런뒤 신하는 그녀를 싼 양탄자를 어깨에 둘러맨 뒤 왕궁을 지키고 있던 호위 병사들에게 집정관에게 줄 선물이라며 둘러대고 왕궁 안에 들어갈수 있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엄청 크고 고급진 양탄자를 들고 오는 모습을 본 카이사르는 한번 풀어보라고 시켰는데요.

그렇게 양탄자를 펼치니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이 아주 야시시한 복장으로 깜짝 등장하는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클레오파트라에게 홀딱 반한 카이사르는 약 30살의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연인사이가 되었죠

 

그 이후 카이사르는 적극적으로 그녀를 밀어주는데요

그덕에 클레오파트라는 정적을 모두 제거한 뒤 다시 이집트의 파라오자리를 되찾았죠.

그런데 카이사르의 이러한 행동에 앙심을 품은 프톨레마이오스 13세 세력은 자신을 따르던 모든 병력을 모아 카이사르를 공격했지만 결국 패배해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7세는 막내 남동생과 다시 재혼해 그를 새로운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4세로 옹립했는데요

당시 새로운 남편이자 막내 남동생은 고작 10살 밖에 안되는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이집트의 모든 권력을 자신의 손에 거머 쥘수 있었죠

그렇게 그녀는 카이사르와의 사이에서 카이사리온 이라는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또한 카이사르를 따라 로마에 방문해 개선식에도 참가하기도 하는 등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죠

그런데 카이사르의 무시무시한 권력에 두려움을 느낀 그의 정적들이 기원전 44년 3월, 그를 암살하는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남편이자 막내동생이던 프톨레마이오스 14세가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일도 일어나자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급히 돌아와 자신의 아들 카이사리온을 파라오 자리에 올렸죠

 

그런 다음 그녀가 한 행동은 자신을 지켜주던 카이사르의 후임을 찾는것이었는데요

그렇게 클레오파트라의 눈에 띈 사람은 바로 카이사르 다음으로 로마 최고의 권력자로 급부상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였죠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 원정에 쓰일 자금을 얻기 위해 클레오파트라에게 타르수스라는 도시에서 만남을 요청했습니다

 

이때가 그를 꼬실 기회라 여긴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갖췄죠

클레오파트라는 황금빛으로 두른 선체에 자주색 돛을 달았고 금실로 수놓은 장막을 드리운채 온갖 보석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배를 타고 은으로 된 노를 저어 강을 거슬러 올라왔습니다

거기다가 아름다운 피리와 하프 소리가 울려퍼졌고 무희들은 그 소리에 맞춰 현란한 춤을 추고 있었으며 배에서는 야릇하고 향기로운 향기가 진동을 하고 있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온갖 보석으로 장식된 옥좌에는 가릴곳만 적당히 가린채 사랑의 여신 비너스로 분장한 클레오파트라가 야릇한 눈빛을 뿜으며 누워있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그녀를 초대했지만 오히려 그녀가 안토니우스를 자신의 배로 방문해 달라고 요구했죠

 

그렇게 그녀를 만나게 된 안토니우스는 이 화려한 첫만남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채 그녀에게 홀딱 빠지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요

그가 다른곳에 한눈팔지 못하도록 언제나 새로운 쾌락을 느끼게 해줬고 날마다 온갖 맛있는 음식에 술과 사냥 등 놀거리를 제공했으며 언제나 음악이 흘러나왔고 무희들은 곁에서 춤추었죠

 

그렇게 약 10여년간 클레오파트라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던 안토니우스는 결국 기원전 37년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고 여러명의 자식들까지 낳을 정도로 금슬 또한 좋았습니다

이후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34년에 한 파르티아 원정을 지원한 공으로 클레오파트라 7세와 자녀들에게 로마의 땅이었던 동방 지역 전체를 나누어 주기도 했죠

 

로마의 최고 권력자가 남편이 되자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근처 나라들 중에서 가장 많은 재물과 권력을 소유한 여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둘의 파멸의 씨앗은 로마에서 싹트고 있었는데요

클레오파트라에 빠진 안토니우스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였던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요구했는데 그녀는 로마의 또 다른 권력자인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였죠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상속자이자 양자였습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를 동서로 나누어 따로 지배할것을 요구하기까지 했죠

그는 아르메니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난 뒤 로마에서만 했어야 했던 개선식을 알렉산드리아에서 해버렸는데요

 

개선식은 로마의 수호신들에게 승리의 영광을 바치는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로마가 아닌 다른 나라나 다른 도시에서 한다는 것은 로마의 수호신들을 배신하는 행위로 여겨졌죠

거기다가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에는 자신이 죽으면 로마가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에 묻어달라고 적혀있었는데 그 내용까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다 까발려져 로마인들에게 충격과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사실 여자에 미쳐 로마의 정치에는 손 놨고 힘들게 정복한 로마의 식민지에서 나온 많은 수입들도 여자와 자식들에게 모조리 갖다 바치는데 로마 시민들이 분노하지 않는게 오히려 더 이상한것이었죠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그를 로마의 수치로 생각했고 그와 원로원은 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했으며 그렇게 서로 전쟁이 벌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옥타비아누스가 이끄는 선단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이끄는 선단이 악티움 해협 밖에서 만나게 되었죠

곧이어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꽤 시간이 지났지만 어느 한쪽에만 전세가 기우는것 없이 서로 팽팽하던 상황이 계속 되고 있었죠

 

그런데 갑자기 뒤쪽에 있던 클레오파트라 7세의 배가 뱃머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쪽이 우세한지 모르고 열심히 싸우던 각 진영의 군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술렁이기 시작했고 안토니우스 쪽이 밀리고 있기 때문에 그녀가 도망간 것이라고 생각해버린것이죠

 

이에 옥타비아누스의 군사들은 사기가 더 올랐던 반면에 안토니우스 군사들은 사기가 떨어져 양군이 팽팽하게 대립하던 상황에서 전세는 드디어 점점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안토니우스 측의 여러 지휘관들도 전선을 이탈하기 시작했고 결국 버티기 힘들었던 안토니우스도 퇴각하면서 이 전쟁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승리를 가져가게 되죠

 

클레오파트라가 성급하게 도망쳐 버린 것이 자신의 편이 패배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버린것입니다

이 전투는 훗날 악티움 해전이라고 불리게 되죠

그렇게 안토니우스는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자신과 자식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에게 협상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고 붙잡힌 뒤 로마에 끌려가 개선식에 내세워져 치욕을 당하느니 죽는게 낫다고 생각해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그녀의 최후는 수많은 이야기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요

이집트 코브라를 과일바구니에 숨겨놓았다가 협상이 거절당하자 코브라가 자신을 물게 해 세상을 떠났다는 설이 가장 유명합니다

 

그외에도 안토니우스와 동반 자살했다는 설도 있고 옥타비아누스가 그녀를 살해한뒤 자살로 위장했다는 설도 있죠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는 이집트를 점령했고 파라오로 있던 그녀의 아들 카이사리온도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클레오파트라 7세는 아름다운 외모와 매혹적인 목소리 등으로 남자들을 홀려 로마를 좌지우지 하다가 결국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여 코브라에게 물려 죽었다라는 이미지 덕분에 현재까지도 마녀나 요부와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죠

정말 아름답고 누군가를 이용할줄 아는 교활한 여자였다는것만은 틀림없는것 같네요

 

지금까지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이자 색기 넘치는 요부로 불리는 클레오파트라 7세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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