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이슬람, 동양과 중동간의 첫 전투이자 세계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던 전투 탈라스 전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당나라와 이슬람 제국과의 사이에서 역사상 첫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는 중국과 이슬람, 동양과 중동간의 첫 전투인 것이었죠
그 전쟁이 바로 '탈라스 전투' 인데요
이 전투는 사실,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전투도 아니었고
사람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전투까지는 아니었지만
세계사에는 많은 의미를 남겼던 전투이죠
오늘은 이 탈라스 전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751년 탈라스 전투가 있기 전
당나라는 꾸준히 서쪽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죠
그렇게 당나라는 신장지역에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중앙아시아에서 침공하는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
당나라군까지 주둔시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당시 당나라군을 지휘하고 있던 인물은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 였죠
고선지는 당나라 서역정벌의 일등공신으로 알려져있는데요
그는 험난한 지역인 톈산 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넘어
여러 나라들과의 전투에서 연전 연승을 거두고 있었습니다
747년에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소발률국을 정복했고
호탄국왕과 토번군을 작살 내버렸으며
750년에는 소그드왕국, 토하리스탄, 서투르키스탄 등을 정벌해
당시 최강국이던 당나라의 권위를
널리 퍼트리는 엄청난 공적을 세웠던 것이죠
또한 고선지는 신강지역을 식민지배 하기 위해 설치한
안서도호부에 소속되어
지배를 당하고 있던 여러 이민족 국가를
관리 감독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이후 고선지는 석국(현재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을 향해 군대를 출진시켰는데요
이 석국을 공격한 것이 바로 탈라스 전투의 시작점이 된 것이죠
석국에서는 당나라 고선지가 쳐들어 오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하지만 고선지는 그들의 항복을 받아주지 않고 그대로 공격을 감행해
석국의 모든 재물을 약탈하고 많은 사람을 죽였으며
집과 건물 등을 파괴하고 불태워 버렸던 것이죠
거기다가 붙잡힌 석국의 왕 차비시를 당나라 장안으로 압송했는데
이후 당 현종이 그를 처형해 버리기 까지 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서역의 작은 나라들에서는
당나라는 항복을 해도 받아주지 않고 다 죽인다는 인식이 퍼지게 된것입니다
이때 포로로 잡혀갔던 차비시의 아들이 당나라에서 도망쳐
서역으로 건너가 여러 나라에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지원을 요청했는데
중동 지역을 거의 통일하고
전성기를 맞이한 아바스 왕조에서도 그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아바스 왕국은 중앙아시아의 작은 나라들을 도와주는것이
그곳을 이슬람화 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보고
즉시 군대를 출진시켰죠
그렇게 아바스 왕국의 호라산 총독 '아브 무슬림 카라시니'는
부하인 '지야드 이븐 살리흐'를 대장으로 삼아
동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고선지 역시 아바스 왕조와 서역의 여러 나라들을 정복하기 위해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는데요
고선지는 진격하면서 72개의 크고 작은 국가들을 정복해 나갔고
마침내 751년 7월, 탈라스 강가에 도착할수 있었죠
그런데 당시 각국에서 동원한 병력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세세한 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병력수를 알수가 없다고 하는데요
다수의 학자들은 아바스군은 약 30만명을 동원했고
당나라는 7만에서 10만정도가 되었다고 추정 하고 있죠
그 외에도 아바스 10만 당나라는 5~6만
아바스 2만, 당나라 1만 등, 현재까지도 여러 주장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체로 원정거리가 길었던 당나라 보다는
아바스군의 병력이 더 많았을거라는 의견은 대부분이 인정하고 있죠
어쨌든 이후 탈라스 강앞에서 마주한 아바스군과 당군은 격돌하게 되는데요
그러나 당나라군의 문제는 진군하는 과정중에
72개국을 정복하면서 진군하기도 했고
게다가 아주 먼길을 왔다보니 피로가 극에 달해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당나라의 동맹국이던 카를루크 군이 배신을 하고
아바스군 쪽으로 붙는 바람에 순식간에 수적인 열세에 밀려
결국 당나라는 패배하고 말았죠
그러나 비록 당나라군이 패배를 했지만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바스와 카를루크 군의 피해가 더욱 컸다고 하는데
그만큼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의 전투력은
이슬람 연합군의 전투력을 능가했던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전투는 양국의 중앙 정부에서는 큰 관심이 없었던
지방 총독들끼리의 전투였죠
그래서 아바스 왕조에서도 전투를 이긴뒤 크게 좋아했다는 기록도 없고
당나라에서도 크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고선지는 큰 처벌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당시로써는 큰 영향이 없던 전투였지만
이후에는 세계사 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는데요
당시 불교를 믿고 있었던 중앙아시아 일대에
점점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나중에 이 일대는 모두 이슬람 문명에 장악되다시피 했습니다
이때 들어온 이슬람교가 현재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대부분 국가의 주류 종교로 정착 된 것이죠
또한 탈라스 전투 직후에 당나라 내부에서는
안사의 난이라는 강력한 내전이 발발하면서
더이상 당나라는 중앙아시아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어버린것입니다
그리고 탈라스 전투에 당나라군으로 참전한 한 병사가
종이를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제지 기술자였는데
전투에서 패배한뒤 포로가 되었고
그 덕분에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에 전파되어
훗날 전 유럽에도 제지술이 퍼져나가는 계기가 되었죠
거기다가 당나라 포로 중에는 '두환' 이라는 인물도 있었는데
그는 포로가 된 이후 여기저기 끌려다니다 결국엔 풀려났던 것입니다
그 이후 그는 시리아와 북아프리카, 동로마제국 등을 둘러보고
12년만에 당나라로 돌아와 책을 지었으니
그 책이 바로 <경행기> 라는 책이었죠
경행기 내용에는 유럽과 이슬람의 국토와 환경, 자원과 의식주, 문화와 종교,
관습과 법까지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며
동로마 제국의 의사들이 뇌수술을 하는 것까지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책 덕분에 당나라에서는 유럽과 이슬람에 대한 정보를
모두 파악할수 있었다고 하죠
하지만 이 경행기는 계속되어 이어지는 여러 전쟁통에 소실되었고
다만 같은 두씨가문 사람인 '두우'가 쓴 통전이라는 책 일부에
이 경행기의 내용이 실려 있으며
여러 역사책에서도 경행기에 대한 내용이 적혀있던 덕에
약간의 내용을 알수 있었다고 합니다
경행기는 소실만 되지 않았다면 정말 중요한 사료와 문화재가 되었을것 같네요
지금까지 비록 사람들에게는 잘 안알려진 전투였지만
세계사적으로는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던
역사적 의미를 크게 가지고 있던 전투
탈라스 전투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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