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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현종의 몽진. 고려 호족들과 백성들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하며, 죽을 뻔한 고비도 있었을 만큼 빡쌨던 현종의 몽진길

by 사탐과탐 2024.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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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호족들과 백성들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하며
죽을 뻔한 고비도 있었을 만큼 빡쌨던 현종의 몽진길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몽진(蒙塵)이란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난리를 피해서 안전한 곳으로 떠나는 것을 의미하죠

우리 역사에서 몽진을 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하면

바로 임진왜란 때의 선조를 들 수 있는데요

 

전쟁통에 피난을 가야 했던 만큼 그 과정이 매우 험난했다고 하는데

이 선조보다 훨씬 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몽진을 했던 국왕이 있었다고 하죠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고려의 8대 국왕 현종입니다

 

1010년 거란의 황제 성종이 40만의 병력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해 오자

고려의 실권자 강조가 30만의 고려군을 이끌고

통주성 앞 삼수채에서 전투를 치렀지만 결과는 고려군의 대패로 끝났죠

 

이후 거란군은 서경에서 고려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이때 양규가 후방에 있던 곽주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12월 17일 성종은 서경을 포기하고

수도인 개경으로 진격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거란군의 본대가 개경으로 몰려온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의 관료들은

두려움에 빠져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항복하자는 의견을 내기 시작했고

현종 역시 그런 신하들의 뜻을 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요

 

그런데 이때 강감찬이 절대 항복해서는 안된다며 강력히 주장한 끝에

마침내 현종도 끝까지 거란과 싸울 것을 결심하게 되죠

다만 국왕이 적군에게 잡혀버리면 그대로 전쟁이 끝나버릴 수 있기 때문에

현종은 잠시 위험을 피해 남쪽으로 몽진을 떠나기로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막상 현종이 피난길에 나서자

그 많던 신하들과 병사, 노비들은 모두 현종을 버린 채 달아나 버렸고

현종과 두 왕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는 지채문을 포함한 몇 명의 신하들과

50명의 금군이 전부였다고 하죠

 

심지어 거란군과 싸울 것을 주장했던 신하들마저

절반이 넘게 왕을 버리고 도망가버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작부터 초라한 행렬로 몽진을 떠난 현종은

이후 생각지도 못했던 굴욕을 계속해서 겪게 되죠

 

위험을 피해 피난을 가는 국왕을 도와줘도 모자랄 지방의 호족과 병사들이

오히려 현종을 무시하고 조롱하거나 협박했고

심한 경우에는 그를 죽이려 드는 일이 계속 생겼기 때문인데요

임진왜란 때 몽진을 떠났던 선조도 이런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몽진을 떠나는 임금에게

고려와 조선의 백성들이 이렇게 다른 태도를 보였던 것은

왕에게 권력이 집중된 중앙집권제였던 조선과 달리

 

현종이 다스리던 시기의 고려는

비교적 왕의 권력이 약한 지방분권체제였던데다

지방 호족들의 세력 또한 막강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게다가 현종을 호위하던 금군도 겨우 50명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왕의 행렬을 우습게 보고 자신들의 사병만 가지고

현종을 위협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12월 29일 오후 행렬이 적성현 단조역에 도착했을 때

단조역을 지키던 하급관리 견영이 자신의 부하들을 끌고

현종을 향해 공격을 해오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죠

하지만 이때 지채문이 앞으로 말을 달려 나가더니

신들린 활솜씨를 보여주며 적군을 쓰러뜨리기 시작했고

겁을 먹은 나머지 병사들은 모두 흩어져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히 도망간 것이 아니라 근처에 있던 산에 숨어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며 다시 한번 현종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는데

이때 지채문이 또다시 활을 들어 그들을 물리쳤다고 하죠

 

12월 29일 저녁 현종의 행렬이 창화현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는데

고을 아전이 병사들을 끌고 나타나서 현종의 앞을 가로막고는

"왕께선 저의 이름과 얼굴을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국왕이 일개 고을 아전의 이름과 얼굴을 알리도 없었고

감히 국왕의 앞을 가로막고 그런 질문을 던지는

그의 무례한 태도에 화가 난 현종이 그의 말을 못 들은척하자

아전은 갑자기 화를 내며 "하공진의 병력이

국왕을 따르는 무리들을 잡으러 왔다"라고 고함을 치기 시작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공진은 과거 고려의 행정구역인 5도 양계 중 양계지역을 지키다가

마음대로 병사들을 동원해 동여진의 부족민 95명을 죽인 게 들키면서

고려 조정에 의해 유배를 간 인물이었습니다

 

때문에 하공진이 고려 조정에 원한을 품고

복수를 하러 달려온 거라 생각한 신하들은

한밤중에 현종을 버려둔 채 모두 도망을 쳐버렸죠

 

이제 현종의 곁에 남은 것은 두 왕후와 시녀 2명

그리고 지채문과 채충순 등 소수의 신하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들이 현종 일행을 습격해 왔고

지채문의 맹활약으로 현종은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는데요

 

12월 30일 저녁 때마침 하공진과 류종의 일행이

국왕의 거처인 행재소가 있는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본 지채문은

지난밤 현종을 죽이려던 것이 그대들이 한 짓이냐 물었지만

확인결과 그 일은 하공진과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하공진 일행은 오던 도중에 전투에서 패배해 도망치던

20명 정도의 고려 병사들을 데리고 현종에게 합류하려 한 것이었을 뿐이었죠

12월 31일 지채문과 하공진은 병사들을 끌고 가

 

창화현에서 현종을 위협했던 무리들을 물리쳐버렸고

이후 지채문이 먼저 현종에게 돌아와 그를 안심시킨 후

하공진 일행을 현종의 앞으로 데려왔습니다

 

이후 하공진은 거란의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 개경으로 길을 떠났는데

하공진이 길을 떠나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그의 앞에 현종을 추격하던 거란의 기병이 나타났죠

 

그때까지도 거란군은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추격대와 현종 일행의 거리는

반나절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다고 하는데요

 

만약 이때 현종이 붙잡혔다면 우리 역사에서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삼전도의 굴욕을

600년은 더 일찍 경험했을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행히 하공진이 거란의 추격대를 설득해

그들을 데리고 개경으로 가서 성종을 만난 뒤

이미 현종이 멀리 떠났다는 거짓말을 해 성종을 속이는 데 성공했고

성종은 현종을 사로잡는 걸 포기한 채 하공진을 인질로 삼고는

그와 함께 온 사신단을 현종에게 돌려보내며

고려의 국왕이 직접 와서 친조를 청하라는 명을 전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현종에게 돌아온 사신단이 거란은 고려의 화해요청을 거절하고

국왕이 직접 성종을 만나러 오기를 원했다는 말을 전하자

그나마 현종의 곁에 남아있던 사람들 중에 일부가 또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그래도 그때까지 남아있던 지채문과 채충순 등이 다른 사람들을 달랜끝에

현종은 겨우 남쪽으로 출발을 할 수 있었죠

 

그런데 현종을 따르던 신하들 중 류종과 김응인이라는 인물이

자기들 마음대로 현종이 탄 말의 안장을 사람들에게 팔아치워 버린 것도 모자라

현종을 따르는 두 왕후를 그녀들의 고향으로 보내버리자며 현종을 압박했습니다

그리고는 현종을 따르는 병사들도 모두 해산해 버리고

최대한 빠르게 적들을 피해 도망가자는 제안을 했죠

 

고민에 빠진 현종은 지채문을 불러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는데

이때 지채문이 갑자기 큰 소리로 울면서

"이렇게 위기에 빠진 상황일수록 민심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한데

왕후들을 버린 채 폐하께서만 살겠다고 도망을 친다면

어찌 백성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한 현종은 지채문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죠

그러자 다음날인 1월 6일 류종과 김응인은

자신들이 먼저 다음 목적지로 가서

현종을 맞을 준비를 하겠다는 거짓말을 하고는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피난길에 있던 지방의 모든 관리들이 현종을 못 본척한 것은 아니었는데요

1월 7일 현종의 행렬이 공주에 도착했을 때

절도사 김은부가 현종을 따뜻하게 맞이하며

준비해 온 옷과 지방의 특산물을 바쳤고

현종은 크게 기뻐하며 김은부가 바친 물건들을 신하들에게 나눠줬죠

 

훗날 현종은 이때의 고마움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몽진길에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준 김은부의 두 딸을 왕비로 삼고

시간이 지나 또 한 명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고 합니다

다시 공주를 떠난 현종일행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위기를 겪게 되죠

 

1월 7일의 늦은 밤 행렬이 여양현에 도착했을 때

현종을 따르던 장수와 병사들이 그를 배신할 마음을 먹은 것인데요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낀 지채문은 현종을 찾아가

그동안 고생을 해온 병사들에게 보답을 하기 위해

그들에게 상을 내려야 한다며 급히 청을 올렸고

현종이 병사들을 불러 하급관리직의 벼슬을 내리면서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다음날 현종 일행이 삼례역에 도착했을 때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죠

그런데 현종을 따르던 신하중 '박섬'이라는 인물이

불길함을 느꼈는지 현종에게 조용겸을 만나지 말 것을 청했고

현종도 그의 말을 받아들여 전주절도사의 행렬을 피해

장곡역이라는 곳으로 방향을 바꿔 그곳에 숙소를 잡았습니다

 

박섬의 예상대로 그날 저녁 전주절도사 조용겸이

국왕을 옆에 끼고 자신도 강조처럼 위세를 부리려는 목적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현종의 숙소를 포위해 버렸는데요

 

하지만 지채문은 숙소의 문 앞을 굳게 지키며

조용겸의 병사들을 향해 "너희들이 어찌 감히

폐하께서 계시는 곳을 함부로 침범하려 하는가"라고 꾸짖었죠

그렇게 지채문 덕분에 현종일행은 무사히 조용겸의 포위를 벗어나

태인현을 지난 후 나주까지 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1월 11일, 거란 성종은 결국 현종을 잡는 데 실패했다고 판단하고는

그동안 거란군에게 약탈당하며 폐허가 된 개경을 버리고

군사들을 물려 본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되죠

그렇게 현종의 길고 험난했던 몽진이 마침내 끝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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