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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김숙흥. 한사람의 백성이라도 더 살리기위해 양규와 함께 처절한 전투를 이어가다가 장렬히 전사한 고려의 무장

by 사탐과탐 2023.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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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람의 백성이라도 더 살리기위해 양규와 함께 처절한 전투를 이어가다가
장렬히 전사한 고려의 무장 김숙흥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은 고려의 명장 양규장군과 함께

최후의 순간까지 한 사람의 백성들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장렬하게 전사한

귀주별장 김숙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010년 11월 요나라의 성종은 40만의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해 왔습니다

통주전투에서 강조가 이끄는 30만 고려군을 격파한 거란군은

기세 좋게 남쪽으로 진격해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국왕인 현종은 이미 남쪽으로 몸을 피한 뒤였죠

 

게다가 흥화진을 지키던 양규가 소수의 부대만을 이끌고

거란군의 중간보급기지 역할을 해주던 곽주성을 되찾으면서

성종은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손해만 더 커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군사들을 물려 본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후방에 있는 서경과 곽주, 통주, 흥화진의 고려군은

절대 그들이 멀쩡히 살아 돌아가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는데요

게다가 거란군은 얼어있는 압록강을 건너 본국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는데

 

고려군이 퇴각하는 요나라군을 상대로

시간을 끌며 그들을 잘 묶어두기만 하면

압록강이 녹은 후에는 요나라군이 오히려 고려에 갇히게 되면서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죠

 

철수하던 요나라 군에게 처음으로 호 된 맛을 보여준 것은

바로 귀주별장 김숙흥이 이끄는 부대였습니다

1011년 1월 성종이 이끄는 요나라 군대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개경을 출발해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며칠 동안 계속해서 큰 비가 내리는 바람에

병사들은 물론 그들이 타고 다니던 말과 낙타까지

모두 지쳐버리는 힘든 상황을 겪고 있었죠

 

지친 병사들은 말과 낙타를 길가에 버려두거나 잡아먹고

갑옷과 무기마저 버린 채 계속해서 행군을 해야만 했습니다

양규의 활약으로 통주와 곽주를 되찾은 후

고려군이 바닷가 주변지역에 무슨 대비를 해뒀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성종은 해안길이 아닌 내륙지방을 통과해 돌아가려 했죠

 

하지만 그들이 귀주성 근처까지 도착했을 때

귀주성 앞에 있는 준곡령이 큰 비 때문에 불어나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길을 건너지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비가 그친 후 계곡의 물이 어느 정도 줄어들자

성종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강을 건너고 있었는데

이때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귀주성을 나와

요나라 군대를 습격하면서 만 명이 넘는 적들을 죽이는 공을 세웠죠

 

보통 부대가 강을 건널 때가 가장 약해지는 순간이기 때문에

김숙흥도 그 순간을 기다렸다가 기습을 한 것으로 짐작된다고 하네요

이때 양규는 20만의 거란군이 있던 무로대를 습격해

2천 명의 목을 베고 3천 명의 고려백성을 구출해 냈습니다

 

이후 양규와 김숙흥은 서로 연락을 하면서 함께 작전을 펼쳤죠

김숙흥은 귀주에서 흥화진 방향으로 거란군을 추격해 들어갔고

양규는 흥화진에서 귀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며 거란군의 뒤를 쳤습니다

이후 이수와 석령, 여리참에서 거란의 부대를 격파한 후

고려의 백성들을 구출한 양규는 김숙흥의 부대와 합류를 하게 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에 거란군의 부대 하나가 나타났다는 정보를 받고

그곳으로 가서 전투를 벌인 끝에 천명이 넘는 고려백성들을 구출해 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이 애전에 성종이 직접 이끄는 거란군의 본대가 나타났죠

 

그동안 양규와 김숙흥에게 수도 없이 많은 공격을 당하며

엄청난 피해를 입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성종 입장에서는 그들을 제거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애전에 나타났던 거란의 부대는 성종이 준비한 함정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아무리 많은 수의 요나라군들이 양규와 김숙흥의 부대를 포위했다고 해도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몸을 빼낼 수 있었을 겁니다

한 달 동안 북방지역을 계속 돌아다니며

거란의 부대와 7번을 싸워 모두 승리한 그들의 기동력과 판단력이라면

거란군을 따돌리고 탈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양규와 김숙흥의 부대는 단 한 사람도 도망가는 일없이

마지막까지 성종의 본대와 싸우다 모두 장렬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조금 전에 구출한 고려의 백성들이

무사히 도망갈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였죠

 

전투가 시작되자 김숙흥은 양규와 함께 거란의 최정예 부대를 맞아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처절한 싸움을 이어나갔지만

마침내 힘이 다하면서 김숙흥이 먼저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양규도 결국은 적들의 화살을 맞아 쓰러졌습니다

 

이때 김숙흥과 양규는 마치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화살을 맞은 채로 죽었다고 하니

그들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죠

하지만 김숙흥과 양규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치열하게 싸우면서 거란군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자신들이 구출한 고려 백성들이 무사히 도망갈 시간을 버는 데 성공했고

이후 지친 요나라군이 압록강을 지날 때

흥화진을 지키던 정성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기습을 당하면서

또 한 번의 큰 피해를 입게 만들었기 때문인데요

 

그전까지 거란군의 기세에 눌려 수비만 하던 고려군은

양규와 김숙흥의 활약을 보며 자신들도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고

거란군이 후퇴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복수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때마침 김숙흥의 부대와 싸운 탓에 만신창이가 된 거란의 부대를 보자

자신감을 얻어 그들을 습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죽은 후 김숙흥은 그의 활약에 걸맞게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게 되죠

현종은 김숙흥에게 장군의 직위를 추증했고

그의 어머니인 이 씨에게는 매년 50 섬의 쌀을 지급하도록 했습니다

 

거란과의 전쟁이 완전히 끝난 1019년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그들에게 삼한후벽상공신의 칭호를 내렸죠

 

'삼한벽상공신'은 태조 왕건이 건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였으니

김숙흥과 양규도 나라를 세운 것과 다름없는 공을 세운 것이라고 인정해 준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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