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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2차 여요전쟁. 시간 순서로 알기 쉽게 정리한 제2차 고려거란전쟁

by 사탐과탐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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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규의 흥화진 전투부터 강조가 완패한 통주 전투 등
2차 여요전쟁(고려거란전쟁)을 시간 순서로 알기 쉽게 정리해보았습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이 많은 관심을 받으면서

거란이 2번째로 고려를 침공해 왔던 시기에 있었던

흥화진 전투나 통주 전투 등에도 관심을 가지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죠

그래서 오늘은 2차 여요 전쟁 시기에 어떤 전투와 사건들이 있었는지

시간별로 한번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봤습니다

 

1009년 2월 4일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면서

새롭게 고려의 국왕이 된 현종은 즉위직후 거란에 사신을 보냈죠

그런데 거란의 황제 성종은

갑작스럽게 목종이 죽었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고는

사람을 보내 알아본 끝에 강조가 목종을 시해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안 그래도 고려를 침공할 명분을 찾고 있던 거란은

1010년 11월 강조의 정변을 핑계로 40만의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침공해 왔죠

성종이 처음으로 선택한 목표는 바로 강동 6주의 최전방인 흥화진이었습니다

 

전투에 앞서 성종은 흥화진에 항복을 권하는 사신을 몇 차례나 보냈지만

흥화진을 지키던 고려의 장수들이 계속해서 거절의 뜻을 밝히자

11월 16일부터 흥화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는데요

하지만 양규가 이끄는 흥화진의 고려군은 3천 명밖에 되지 않는 병력으로

40만의 적군을 상대로 10일이 넘게 버텨내는 기적을 보여줬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결국 성종은 흥화진을 포기하고 병력을 둘로 나눠

20만의 병력을 무로대에 남겨둔 채 나머지 20만을 이끌고 남쪽으로 진격했죠

당시 고려의 최고권력자였던 강조는 거란 본대의 진격을 막기 위해

급히 30만 명의 병력을 소집해서 통주로 떠났고

11월 24일 통주성 앞 삼수채에서 통주대전이 펼쳐졌습니다

 

초반에는 검차를 이용한 고려군에게 유리한 분위기로 흘러갔지만

이를 보고 방심한 강조가 거란 기병에게 기습을 허용하면서

순식간에 고려의 본대가 무너져내려 버렸고

총사령관인 강조는 포로로 붙잡히는 비극을 맞으며

통주전투가 고려군의 패배로 끝났죠

 

대회전에서 승리한 거란군은 기세를 몰아 통주성을 점령하려고 했지만

성에 남아있던 중랑장 최질과 홍숙 등이 병사들을 잘 지휘해

일주일 넘게 통주성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고

결국 거란군은 흥화진에 이어 통주성을 점령하는데도 실패한 채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고려의 국왕 현종은 통주 전투에서

고려의 주력군이 사라졌다는 참담한 소식을 듣고 놀라서

동북면의 도순검사인 탁사정과 중랑장 지채문을 급히 서경으로 보냈죠

 

하지만 이때 서경에서는 대부분의 장수들이

싸우지 말고 거란에 항복하자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서경부유수였던 '원종석'도 거란에 항복하기로 결정을 내린 후였습니다

때문에 서경에 먼저 도착한 지채문이 성안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원종석은 그에게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죠

 

지채문은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인물에게 연락을 보내

겨우 서경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지만

이미 거란에 항복하는 사신이 떠난 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지채문은 즉시 항복하러 가는 사절을 추격해

그들을 죽여버린 후 항복문서까지 불태워버리며 서경이 항복할 길을 막아버렸고

이에 분노한 부유수 원종석은 지채문의 군대를 서경성 밖으로 내쫓아버렸죠

 

뒤늦게 동북면의 주력부대를 이끌고 도착한 탁사정은

지채문에게 이 황당한 소식을 전해 듣고는

몰래 성에 잠입해서 원종석을 죽여버린 후

서경성을 장악하고 거란과의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11월 30일 현종은 시간을 끌기 위해

성종에게 거짓으로 항복하는 사신을 보냈는데

그것이 진짜라 믿은 성종은 크게 기뻐하며 서경으로 먼저 사람을 보냈죠

하지만 이들은 탁사정과 지채문이 이끄는 병사들에게 전멸당했습니다

 

12월 6일 통주성과 함께 고려의 중요거점이라 여겨지는

곽주성이 거란군에게 점령당해 버렸는데요

고생 끝에 겨우 곽주성을 점령한 성종은 무로대 대신

곽주성을 자신들의 새로운 보급기지로 삼았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후 서경으로 진격한 거란의 본대는

12월 9일 지채문이 이끄는 고려의 부대를 유인해낸 뒤

거꾸로 그들을 기습하는 작전을 펼치며 승리를 거뒀죠

상황이 불리해져 가는 것을 느낀 탁사정은

거란군을 공격하는 척 성을 나와서는 남쪽으로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성을 지키던 주력부대를 잃은 서경은 위기에 빠졌지만

통군녹사 '조원'과 애수진장 '강민첨'등의 활약으로

겨우 서경을 지켜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죠

하지만 워낙 상황이 불리했기에 서경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12월 16일 성종의 귀에 양규라는 고려의 장수가

자신들이 새로운 보급기지로 삼았던 곽주성을 탈환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죠

흥화진을 지키던 양규가 1700명밖에 되지 않는 소수의 병력으로

무려 6천 명이나 되는 거란군을 전멸시켜 버리고 성을 차지한 것인데요

원래 적군이 지키고 있는 성을 점령하려면

수비하는 병력보다 공격하는 병력이 더 많아야 겨우 성공을 할 수 있는데

양규는 적군의 절반도 되지 않는 병사들만으로 기적과도 같은 일을 해냈죠

보급기지인 곽주성을 잃으며 곤란한 상황에 빠진 성종은

결국 서경을 포기하고 수도인 개경으로 진격하는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때문에 다음날인 12월 17일부터 바로 개경으로 진격을 시작했는데

다행히 서경 근처에 엄청난 돌풍이 일면서

많은 거란의 병사들과 말이 다치는 사고가 일어났고

덕분에 현종은 남쪽으로 몸을 피할 시간을 벌 수 있었죠

 

12월 29일부터 31일까지 현종은 몽진을 가는 동안 고을 아전에게 무시를 당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병사들에게 공격을 당하는 등 수없이 많은 위기를 겪었지만

충성스러운 신하 지채문의 맹활약 덕분에

그 모든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남쪽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1월 1일 개경에 입성하는 데 성공한 거란의 군대는

국왕인 현종이 이미 몸을 피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개경에 있던 궁궐과 민가를 불태운 뒤 병사들을 보내 현종을 추격했죠

 

이때 추격군이 계속해서 말을 타고 달렸으면

6시간이면 현종을 따라잡을 수 있었을 만큼 그들 사이의 거리가 가까웠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이때 하공진이 추격대의 앞에 나타나

자신이 고려의 사신이라고 주장하며 그들과 함께 개경으로 돌아갔고

이후 성종에게 고려의 국왕이 이미 멀리 피했다는 거짓말을 하면서

스스로 인질이 되는 선택을 한 덕분에 현종은 겨우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계속해서 몽진을 가던 현종은 1월 10일 나주에 도착했는데

나주로 가는 길에도 현종에게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종을 따르던 병사들이 왕을 배신할 마음을 먹기도 하고

전주절도사 조용겸이라는 인물이 현종을 옆에 끼고 위세를 부리려고도 했지만

 

그때까지 유일하게 현종의 옆에 남아있던 지채문이

불만을 가진 병사들을 달래기도 하고 온갖 위험으로부터 현종을 보호하면서

현종이 무사히 몽진을 마칠 수 있도록 엄청난 활약을 했죠

 

1월 11일 마침내 성종은 현종을 잡는 것을 포기하고

개경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각지에 있던 고려의 군사들은

멋대로 고려를 침공해 온 거란의 군대를 그냥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죠

 

1월 12일부터 성종의 본대는 북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큰 비가 계속해서 내리면서

병사들은 물론이고 그들이 타던 말과 낙타들까지 극도로 지쳐갔습니다

 

결국 거란의 병사들은 말과 낙타를 잡아먹고

가지고 있던 갑옷과 무기까지 버린 채 행군을 계속했는데

귀주성 근처에 도착했을 때 성 앞의 험한 계곡이 큰 비로 불어나는 바람에

강을 건너지 못하고 막혀있는 상황에 처해있었죠

 

1월 17일에 김숙흥과 중랑장 보량이 귀주성을 나와

곤경에 빠진 거란군을 습격해 만 명이 넘는 적을 죽이는 대승을 거뒀습니다

1월 18일부터 1월 22일까지는 양규가 무로대와 이수, 여리참 등에서

연달아 거란군의 부대와 싸워 수천 명의 적들을 죽이고

5천 명이 넘는 고려의 백성을 구출해 내는 데 성공했죠

 

1월 28일에는 양규와 김숙흥이 애전에서

천명의 거란병사들을 죽이고 3만 명이나 되는 고려의 포로들을 구출해 냈는데

안타깝게도 이것은 성종이 판 함정이었습니다

양규와 김숙흥을 끌어들이기 위해 일부러 미끼를 던진 것이었죠

 

양규는 이것이 적들의 함정이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그들이 구출해 낸 3만 명의 고려인 포로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

도망가는 대신 목숨을 던져 싸우는 것을 선택했죠

 

그렇게 양규와 병사들은 마지막 한 사람이 쓰러질 때까지

악착같이 싸우다가 모두 죽음을 맞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양규의 부대와 싸우느라 만신창이가 된 거란군은

1월 29일 압록강을 건너고 있을 때

흥화진사 정성이 이끄는 부대의 기습을 받으면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죠

 

이후 성종은 고려의 국왕이 약속한 대로 거란에 친조할 것을 계속 요구했지만

그 당시 고려가 친조를 하려 했던 것은

단순히 시간을 벌기 위한 계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현종은 계속해서 성종의 청을 거부했죠

 

이에 화가 난 성종은 야율행평과 이송무 등을 사신으로 보내

강동 6주를 힘으로라도 되찾겠다며 고려를 협박했습니다

두나라 사이의 분위기가 또다시 험악해지면서

고려와 거란은 또 한 번의 전쟁을 치를 준비에 들어가게 되죠

 

그렇게 3년의 짧은 평화가 끝나고

1014년부터 계속해서 고려를 도발해 온 거란이

1018년 명장 소배압을 총사령관으로 한 10만의 대병력으로

또다시 고려를 침공하면서 제3차 여요전쟁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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