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선의 치의 시작, 명나라 몇 안되는 명군 중 한명 황제가 된지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난 황제 홍희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한나라 문제와 경제가 나라를 다스릴때 태평성대를 가리켜 문경지치라고하고 당 현종때의 태평성대는 개원지치 (연호가 개원) 당 태종때의 태평성대는 정관지치 (연호가 정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기를 강건성세라고 부르는데요
이런 태평성대는 명나라때에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선지치로 명나라 4대 황제였던 홍희제 (묘호 인종)와 그의 아들 선덕제 (묘호 선종)의 치세를 가리키는 말이죠
홍희제의 삶은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문종과 조금 흡사하긴 한데요
오늘은 인선지치의 문을 연 명나라 홍희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홍희제의 이름은 주고치 인데요
그는 1378년 영락제의 첫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주고치는 어릴적부터 공부하는것도 좋아하고 활쏘기나 무예를 익히는것도 좋아했다고 하죠
하지만 공부하기를 더 좋아해서 시도때도 없이 유가의 경서를 읽었는데 그 덕분에 할아버지였던 주원장도 그를 굉장히 총애했다고 합니다
또한 어머니는 개국공신인 서달의 딸인 인효문황후 서씨였는데 그녀의 따뜻하고 인자했던 성격을 닮아 주고치 역시 항상 자상하고 인자했다고 하죠
한마디로 어릴적부터 성군의 자질을 보였던 것입니다
이후 주고치는 1395년에 별다른 사건없이 세자로 책봉될수 있었죠
그리고 1398년, 주원장이 세상을 떠나면서 다음 황제인 건문제에게 위협이 될까봐 번왕이던 아들들에게 자신의 장례식에는 오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러자 연왕 주체는 자신을 대신해 주고치와 다른 두 아들에게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다녀오라고 명했죠
그렇게 주고치는 동생들과 함께 장례식 참석을 위해 남경에 왔다가 그곳에 머물고 있었는데요
주원장 이후 황제로 즉위한 건문제는 자신의 제위에 위협이 되는 번왕들을 족치고 있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연왕 주체도 언젠가는 자신의 차례도 올것이라 생각해 1399년에 반란(정난의 변)을 일으켜 버렸죠
이때 남경의 심각한 분위기를 감지한 주고치는 동생들과 함께 얼른 아버지 주체의 근거지이던 북평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주고치를 비롯한 연왕 주체의 아들들을 인질로 삼아야 한다는 제태와 연왕을 방심하게 하려면 이들을 풀어줘야 한다는 황자징이 대립했는데 건문제는 결국 황자징의 말을 따라 주고치를 풀어주었고 그들은 무사히 북평으로 돌아갈수 있었죠
이때 인질로 잡혔다면 주고치도 죽임을 당할수 있었겠지만 건문제의 잘못된 선택으로 다행히 무사히 풀려날수 있었던 것입니다
북평으로 돌아간 주고치는 이후 그곳의 방어를 맡게 되었죠
그리고 1399년 11월 이경륭이 대군을 이끌고 북평을 공격해 들어왔을때 주고치는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해 고작 1만의 군사만으로 이경륭의 대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하면서 그의 뛰어난 학문실력 뿐만아니라 훌륭한 군사적 재능까지 보유했다는것을 증명해 냈습니다
마침내 주체가 정난의변에서 승리하고 영락제로 즉위하자 그 역시 황태자가 되었죠
그 이후에도 영락제가 북벌을 하기위해 북경에 머물자 주고치는 황태자의 자리에서 남경에 머물며 아버지 영락제를 대신에 황제의 업무를 수행했으며 이때부터 수많은 국정을 도맡아 처리했고 그만큼 정치와 행정에 관해 많은 경험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421년이 되자 영락제는 북평을 수도로 삼으면서 이후 그곳의 명칭이 북경이 되었고 주고치 역시 북경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죠.
하지만 주고치는 문무 모든 면에서 뛰어난 편이었지만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요
어릴때부터 병약했고 비정상적으로 굉장한 비만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성인이 되었을때는 스스로 걷기도 힘들정도 였기 때문에 어딜가나 가마나 수레를 타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고 하죠
상태가 그렇다보니 영락제는 처음 황태자를 누구로 삼을지 대신들과 의논할때 차남이던 주고후를 태자로 삼는게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다른 신하들이 비록 주고후가 정난의 변에서 많은 공을 세우긴 했지만 성질이 난폭하고 거칠기 때문에 주고후가 황태자가 되는것에 대해 격렬히 반대를 했던 것입니다
또한 영락제는 주고치의 건강이 좋지는 않지만 그의 아들인 주첨기가 어릴적부터 황제의 자질을 보였고 주고치의 아내인 황태자비 장씨를 총애 했었기 때문에 결국 주고치를 황태자로 삼았던 것이죠
이후로도 영락제는 자주 수도를 비웠기 때문에 그때마다 황태자인 주고치는 아버지를 대신해 정사를 보았고 이후 1424년 영락제가 원정에서 돌아오는중에 세상을 떠나자 주고치는 1424년 9월, 홍희제로 제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과거 수많은 정사를 도맡아 봐왔기 때문에 황제로 즉위하자마자 능숙하게 선정을 펼치기 시작했는데요
정난의 변 당시 멸문당한 일가를 신원해 주기도 했고 북벌에 반대하다가 처벌받은 옛 신하들을 석방하고 복권시켜주었죠
또한 조정의 폐단을 혁파하기 위해 무능력한 관리들과 비효율적인 관료제를 개선하기 위한 움직임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홍무제(주원장)와 영락제의 강력한 통치로인해 제대로 된 직언을 올리지 못했던 신하들과 정치에 대한 폭넓은 대화를 나누며 그들이 직언을 할수 있도록 하게 해주었고 그리고 여러 대신들의 조언도 마다하지 않았죠
그러자 신하들이 더욱 좋은 의견을 내기 시작했고 그만큼 홍희제도 신하들의 의견을 존중해주기 시작하자 서로간의 신뢰도가 쌓이면서 관계도 굉장히 좋아졌습니다
또한 그는 아버지 영락제가 했던 팽창정책을 싫어했는데 정화의 원정을 중지 시키면서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일들을 줄여 나가며 국고 손실을 막기 시작했고 오랜 전쟁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위해 노력했죠
한편 홍희제는 남경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날씨가 상대적으로 더 춥고 황량한 북경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수도를 남경으로 바꾸기 위해 황태자인 주첨기를 남경으로 보내 천도를 준비하라는 명을 내렸죠
하지만 워낙 몸이 약하고 상태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황제가 된 이후에도 병을 달고 살다가 결국 재위 8개월만인 1425년 5월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남경천도는 흐지부지되고 말았고 이후 계속 북경이 명나라 수도가 되었죠
그는 어찌보면 조선의 문종과 굉장히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요
황태자 시절부터 오랫동안 아버지를 대신해 정무를 맡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굉장히 노련한 모습을 보였고 총명하기도 했으며 성격이 온화하고 성군의 자질까지 보였죠
거기다가 병약했던것과 황제가 된 이후 얼마안가 세상을 떠난것도 문종과 공통점이 많아 보입니다
비록 1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동안 재위 했지만 선정을 베풀고 안정적인 국정을 운영했던 덕에 이후 재위에 오르는 선덕제는 명나라의 몇 없는 명군 중 한명이 되죠
지금까지 명나라의 4대 황제, 홍희제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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