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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731부대. 인간이길 포기한 일본의 마루타 생체실험

by 사탐과탐 2021.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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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부대는 이시이 시로가 부대장으로 부임하면서 악마도 울고 갈 정도의 상상도 할 수 없는 생체실험을 하기 시작했었습니다.
실험을 위해 강제로 끌고 온 사람들을 통나무라는 뜻의 마루타 라고 불렀는데요.
이시이 시로와 731부대원은 인간이길 포기했던 극악의 전범자들인데도 일본 패망 이후 미국의 추악한 정치질에 의해 죗값을 치르기는 커녕 면죄부를 받았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서 세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일명 '죽음의 천사'라고 불리는 '요제프 멩겔레'에 의해 극악 무도한 생체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요제프 멩겔레와 비견될 정도의 사악한 인물 '이시이 시로'와 그가 부대장으로 있던 731부대의 만행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부대로 알려진 731부대는 많이 들어 보셨을 테지만 이 부대를 세운 이시이 시로는 좀 생소하실 텐데요.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이었고 그가 부대장으로 있던 731부대로 인해 한국, 중국, 몽골, 미국, 러시아 등 연합군의 군인과 민간인, 여자와 어린아이를 포함한 약 1만 명의 사람들이 실험재료 로써 희생되었으며 이들이 개발한 생화학무기로 인해 수십만 명의 중국인이 학살되었죠.

 

그러면 이런 악마 같은 이시이 시로는 훗날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범재판에도 회부되지 않고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대체 731부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고 부대장인 이시이 시로는 어떻게 처벌을 면할 수 있었을까요?

 

(이시이 시로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시이 시로는 1892년에 일본의 치바현에서 태어나 교토 제국 대학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는데요.

이후 육군 병원과 육군 군의 학교에서 군의로 근무를 했었죠.

이시이 시로의 성격은 굉장히 이기적인 성격에 물욕, 권력욕, 명예욕에 가득 찬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부대 예산을 횡령해서 자신의 집을 짓기도 하고 군대에 물품을 납품하는 업체에서는 뒷돈을 받기도 했을 정도였죠.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의 군대는 만주지역에서 주둔을 하고 있었는데요.

만주지역은 공기도 나쁘고 수질도 좋지 않아서 말라리아나 장티푸스 같은 전염병이 자주 창궐했으며 일본군은 전투를 치루다 다치거나 죽은 사람만큼 병에 걸려 죽은 사람도 많이 발생했기 때문에 깨끗한 물에 대한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습니다.

그러자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는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급수부대를 창설할 것을 명령했고 이렇게 해서 1936년에 '방역급수부대'가 만들어졌죠.

 

말 그대로 전염병을 예방하고 물을 공급하는 부대였지만 부대장으로 이시이 시로가 부임하면서 이 부대 명칭은 위장 명칭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바로 이 방역급수부대에서는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인체실험을 자행하기 시작했고 생화학무기를 개발하는 업무를 맡게 된 것이죠.

그러다 1941년에 부대 명칭을 '731' 부대로 바꾸게 되었습니다.

 

731부대는 만주의 하얼빈시 핑팡구에 위치해 있었는데요.

그렇다 보니 수많은 중국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강제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중국인 외에도 조선인,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몽골인, 미국이나 소련 등 연합군 포로에 이르기까지 굉장히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끌려가서 생체 실험을 당하게 되었죠.

심지어 731부대에서는 성별, 연령, 신체 스펙을 명시해 놓고 이런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요청하기까지 했고 일본군은 필요한 스펙을 가진 민간인들을 납치해서 요청을 들어주기도 했습니다.

 

(731부대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731부대의 사람들은 끌려간 사람들을 통나무라는 뜻의 '마루타' 라고 불렀는데요.

이들은 마루타가 지르는 비명이나 신음에 대해 완전히 무시하라는 세뇌를 받았죠.

이 부대에 처음 전입한 신병은 무조건 치뤄야 하는 신고식이 있었는데요.

공범의식도 심고, 마루타를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인식하도록 만들기 위해 끌려온 마루타들 중 가장 반항이 심한 사람이나 마루타로써 가치가 별로 없는 사람 한 명을 무조건 때려죽이도록 강요했죠.

 

게다가 731부대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수용자를 석방시키지 않았습니다.

실험이 종료된 경우엔 수용자가 살아있든 죽었든 간에 '소각' 처리했죠.

또한 만약 어떠한 이유로 부대가 해체해야 할 경우에는 모든 수용자를 '정리'했는데요.

이 정리는 말 그대로 수용자 모두를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생체 실험한 내용을 보면 가히 충격적이고 엽기적인데요.

수용자에게 탄저균이나 천연두균 등을 주입해서 결과를 보는 건 가벼운 수준이었죠.

그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마취도 없이 그대로 해부해서 내장을 빼내기도 했고 심지어 동물의 내장과 교체를 하는 실험도 했습니다.

또한 총기의 관통력을 테스트하기도 했는데요.

살아있는 사람을 팬티만 입힌 조, 평상복을 입은 조, 겹겹이 방한복을 입은 조로 나누어 총을 쏴버리기도 했죠.

 

(731부대 생체실험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게다가 저온에서 몸의 세포가 죽어가는 과정을 관찰한다고 수용자 몸의 일부만 얼리는 실험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통째로 원심분리기에 넣고 돌리기도 했는데 이때 얻은 결론이 '인간의 70%는 물이다' 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사람을 죽을 때까지 건조시키는 실험, 영하 50도에서는 얼마나 버티다가 죽는지 관찰하는 실험, 독가스를 터트리고 몇 분 후에 죽는지에 대한 실험 등 수많은 잔인한 실험을 했죠.

 

일본 헌병에서 체포한 조선의 독립운동가 40여 명을 재판도 거치지 않고 데려와 이들에게 코렐라균과 페스트균을 주입하는 실험이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생체반응을 보기 위한 참혹한 실험을 다양하게 했는데요.

이 생체반응 실험은 성인 남녀, 어린이, 영아 그리고 임산부까지 모두가 대상이 되었습니다.

 

질병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보기 위해 장기를 제거하기도 했고 여러 질병에 걸린 수용자를 산 채로 해부하기도 했죠.

또한 출혈 연구를 위해 수용자의 팔이나 다리를 자르기도 했습니다.

절단된 팔이나 다리는 반대쪽에 다시 붙이기도 했죠.

어떤 수용자들은 팔이나 다리를 얼린 채 절단하기도 했고 치료받지 못한 채 녹으면서 괴사하거나 부패하는 것을 관찰하는 실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위를 잘라내고 식도와 장을 직접 연결하는 실험, 뇌, 폐, 간의 일부를 잘라내는 실험,

피부를 벗겨내는 실험,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적출해서 각각 상대방에게 이식하는 성전환 수술 실험 등 경악을 금치 못하는 실험이 계속해서 이어졌죠.

그 밖에도 수용자들을 다양한 거리에 위치시켜 놓은 뒤 수류탄을 터트려 수류탄의 살상력을 알아보는 실험과 인간을 대상으로 한 화염방사기 실험 등을 하기도 했습니다.

 

(731부대 생체실험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성병에 대한 연구를 하기 위해 남녀 수용자들을 서로 강간하게 해서 매독, 임질을 감염시키는 실험을 하기도 했으며 수용자들에게 배급되는 만두에 세균을 집어넣고 급식을 한 뒤 관찰하는 실험이 이어졌죠.

그 외에도 숨 막혀 죽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알아보기 위해 수용자를 목 매달기도 했으며 사람 신장에 말의 소변을 주입하기도 했고 물과 음식을 주지 않고 얼마나 사는지에 대한 실험도 했습니다.

 

그리고 극저의 온도에서 언제 동상이 걸리는지 또 그런 조건에서는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동상이 걸리면 어떻게 변하는지에 대해서도 실험했죠.

또한 동물의 혈액을 인간에게 주입한 뒤 그 효과에 대한 실험도 했습니다.

윤동주, 송몽규가 당했을 거라는 추측이 있는 생리 식염수가 얼마나 혈액을 대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사람에게 식염수를 주사한 실험도 있었죠.

 

그중 가장 잔인하다고 할 수 있는 실험은 바로 모성애 테스트인데요.

이 실험은 일명 프라이팬 룸 모성애 실험이라고 불렸습니다.

방에 아이와 엄마를 가두고 바닥을 프라이팬처럼 달구는데요.

엄마가 언제쯤 모성애를 잃고 아이를 밟고 서게 되는지에 대한 실험이었죠.

이외에도 많은 잔인한 실험이 자행되었지만 너무 많기 때문에 이만 줄이겠습니다.

 

731부대원들은 실험 외에도 인권을 처참하게 유린하는 짓거리도 하는데요.

실험을 통해 쇠약해지거나 병든 수용자들을 원판에 묶은뒤 돌려서 단검을 던지는 게임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신체 부위에 점수를 매겨 일등을 한 사람이 돈을 따는 등의 도박도 했죠.

 

그러던 1945년 8월 9일. 일본이 주둔하고 있던 만주를 소련이 공격을 했는데 이에 731부대 역시 철수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끔찍한 실험을 자행했던 부대원들도 이게 얼마나 심한 만행이었다는걸 알고 있었는지 바깥에 알려지지 않도록 모두 일명 '정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병대가 투입되어 주요 건물들을 폭파 시켜버렸고 당시 살아있던 마루타들 또한 모조리 죽였으며 실험 결과가 기록 되있는 문서들만 가지고 일본으로 도주했죠.

 

그러다 결국 일본제국이 망하게 되면서 전범재판이 열리게 되었는데 731부대원들 또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는데요.

이들이 막대한 실험 자료를 가진 걸 알아챈 미국에서는 이들을 감싸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 커버를 쳐준 덕에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731부대원들은 실험에서 얻은 자료들과 연구 성과들을 미국에 제공하고 러시아에는 넘겨주지 않는다는 대가로 그들 대부분은 그들이 지은 잔인한 죄에 대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죠.

 

그리고 미국 국무부는 이시이 시로 등 731부대원들이 가진 세균 실험자료를 얻기 위해 당시 더글러스 맥아더 미국 주일 최고사령관에게 “이시이 시로와 동료들의 전쟁범죄 책임을 묻지 않아도 된다" 라는 지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미국은 소수의 미국인이 생체실험을 당해서 희생됐을 때는 그 관련자들을 조사하고 처벌도 했지만 731부대에서 생체실험을 행한 가해자인 이들은 전혀 처벌하지 않았죠.

 

(일본 전범재판 -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뿐만 아니라 731부대원들을 돈을 주고 실험 연구원으로 고용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미국이 연구 결과에 눈이 멀어 전범에게 면죄부를 줘버린 탓에 잔인하게 희생된 사람들만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게 되는 비극이 되어버렸고 이는 미국이 난징대학살이나 만주사변, 위안부 문제 등과 달리 731부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최대한 말을 아끼는 이유이기도 하죠.

 

이후 이시이 시로는 미국의 포트 데트릭 생물무기 고문이 되어 생물학 무기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고 지속적으로 미국 측에 각종 데이터와 자료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잘 먹고 잘 살다가 1959년 10월 9일, 이시이 시로는 67세의 나이로 도쿄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이후 일본 정부는 계속해서 731부대의 참혹한 학살에 대해 부정을 하다가 2002년 8월에 도쿄 지방 법원은 731부대의 존재와 범죄사실 일부를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후로도 731부대에 대한 극비문서가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죠.

그리고 731부대의 남겨진 건물은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중학교로 사용되다가 2001년부터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전시관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일제시대에 일어난 일본의 잔혹한 만행은 파도파도 끝이 없는 것 같네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사악할 수가 있을까 싶은 이시이 시로와 731부대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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