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시대 로마 교황청을 장악한 최고 권력을 가진 보르자 가문이 있었습니다.
교황과 그의 아들은 딸인 루크레치아와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는 사이였죠.
루크레치아는 소문대로 희대의 요부였을까요? 아니면 아버지와 오빠에게 놀아난 불쌍한 여인 있었을까요?
오늘 이야기할 인물에 대한 평가는 매혹적인 악녀 또는 야심 많은 아버지와 오빠에게 휘둘린 가련한 여인 이렇게 양극단으로 나뉘는 '루크레치아 보르자' 라는 인물입니다.
1480년 4월 18일. 보르자 가문에서 어여쁜 딸이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로드리고 보르자'로 훗날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되는 인물이었죠.
눈부신 금발머리에 너무나도 예뻤던 루크레치아는 앞으로 순탄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갔을 거라고 생각되겠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엄청난 야망을 가졌던 아버지와 오빠에 의해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었죠.
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따져 여기저기 루크레치아를 정략결혼 시켰고 결혼 상대가 가치가 없어지면 이혼시키고 또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보냈죠.
그래서인지 루크레치아가 고작 13살밖에 안됐을 때도 이미 아버지에 의해 두 번의 약혼과 두 번의 파혼이 있었습니다.
또한 아버지 오빠와 함께 근친상간을 하기도 했는데요.
당시 로마에서 보르자 가문의 근친상간에 대한 소문은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기에 로마 시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죠.
그렇게 그녀는 아버지와 오빠에 의해 처음부터 불운한 삶을 시작했습니다.
루크레치아의 첫 번째 결혼은 훗날 아버지인 로드리고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되고 나서
강국이던 밀라노 공국과의 동맹을 맺고자 조반니 스포르차와의 정략결혼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밀라노 공국의 힘이 약해지고 스포르차 가문의 약발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눈치챈 알렉산데르 6세는 루크레치아를 이혼시킬 생각을 가지게 되었죠.
그래서 '사위인 조반니가 성적 불구자라서 결혼생활이 불가능하다'라는 이유로 이 결혼은 무효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조반니는 루크레치아를 아버지, 오빠와 근친상간을 저질렀다고 비방하며 맞불작전을 썼죠.
하지만 아버지 로드리고는 조반니에게 이혼을 해주지 않으면 스포르차 가문은 멸문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협박과 루크레치아의 모든 결혼 지참금을 주겠다는 제의를 했고 다른 방도가 없던 조반니는 자신이 성 불구자라고 인정하는 서류와 결혼 무효 서류에 서명을 하면서 둘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결혼 무효 소송이 길어지자 루크레치아는 조반니의 집을 나와 '산 시스토 수녀원'에 머물렀는데요.
의문스러운 점은 당시 루크레치아는 임신 중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임신한 아이는 훗날 '로마의 아들'로 불려지는 '조반니 보르자' 이죠.
그러나 현재까지도 조반니 보르자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의견이 분분한데요.
아이의 아버지에 대한 첫 번째 썰은 어느 날 로마에서 아버지의 심부름꾼이던 페로토가 아버지의 서신을 가지고 루크레치아를 찾아오게 되었고 사실 그녀와 페로토는 남몰래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오랜만에 만난 둘은 은밀히 사랑을 나누었고 그렇게 그녀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썰입니다.
또한 페로토가 아버지 일 수도 있다는 의문을 증폭시키는 이유는 페로토가 어느 날 갑자기 티베르강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죠.
오빠인 체사레가 여동생의 안 좋은 소문이 날것이 염려해 입막음을 하려고 그를 죽인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썰은 그 아이의 성이 '보르자' 이다보니 '아버지와 루크레치아의 사이에 근친상간으로 낳은 아이다' 라는 의혹도 있죠.
이렇게 의혹과 소문이 퍼지자 훗날 그녀의 아버지이자 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는 두 개의 교황 교서를 썼는데 첫 번째 교서 내용은 '그 아이의 아버지는 체사레다' 이고 두 번째 교서 내용은 '그 아이의 아버지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이다' 였죠.
그러나 첫 번째 교서만 반포가 되었고 두 번째 교서는 오랫동안 비밀로 지켜졌습니다.
그렇게 아이의 아버지는 오빠인 체사레의 아들로 굳어져 갔죠.
그런데 나중에 조반니 보르자는 루크레치아와 페라라 궁에서 같이 산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그는 루크레치아의 이복동생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의 아들인 것인데 누가 진짜 아버지 인지는 알 수가 없을 것 같네요.
어쨌든 이혼 후 루크레치아는 나폴리 왕의 서자이자 훈훈한 미남으로 유명한 아라곤의 알폰소 공작과 재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 전 체살레는 알폰소를 본 적이 있는데 그의 잘생긴 외모와 인품에 멋있다고 감탄을 했지만 여동생이 시집을 간 이후로는 질투가 났는지 그에 대한 적대심을 갖게 되었죠.
거기다가 여동생 루크레치아가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어지고 매너 좋고 잘생기기까지 한 남편에게 푹 빠지자 체사레는 더 알폰소를 증오하기 시작했죠.
또한 당시 체사레는 매독으로 인해서 얼굴에 징그러운 흉터가 많았었는데 그 때문에 항상 가면을 썼고 검을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숨기고 싶은 치부를 알폰소가 루크레치아에게 이야기 한 것에 앙심을 품고
알폰소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자객을 시켜 밤중에 그를 습격했죠.
습격당한 알폰소는 생명이 위험할 정도로 위독했지만 아내인 루크레치아의 간호로 점점 회복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알폰소를 습격한 자객의 배후가 체사레인 것을 알게 된 알폰소의 하인은 체사레에게 화살을 쏴 복수를 했는데 이에 격분한 체사레는 결국 또 자객을 시켜 회복 중이던 알폰소를 죽이게 되었죠.
루크레치아는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오빠에 의해 행복했던 결혼생활은 고작 2년 만에 끝나버렸고 그녀는 남편의 죽음에 무척이나 애통해 했다고 합니다.
체사레가 알폰소를 죽인 이유에는 질투와 증오도 있었지만 알폰소의 정치적 힘이 약해지자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고 그렇게 그는 제거된 것이었죠.
두 번째 남편과도 이별을 한 루크레치아는 슬퍼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는 딸의 세 번째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은 페라라 공작이자 에르콜레 1세의 아들인 '알폰소 데스테'였습니다.
그는 루크레치아의 불미스러운 소문을 들었기에 그녀와의 결혼을 거부했지만 교황과 체사레의 압박에 의해 결국 결혼을 하게 되었죠.
정략결혼 치고는 그녀와 데스테와의 금슬은 굉장히 좋았고 많은 자녀를 낳았으며 처음으로 그나마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지속적으로 친오빠이던 체사레와 근친상간을 하고 있었고 동시에 피에트로 벰보라는 애인까지 만들어 오랜 시간 그와도 많은 사랑을 나누며 바람을 피워댔죠.
그러던 1503년 그녀의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가 세상을 떠나고 이어 1507년 오빠인 체사레가 죽은 후 보르자 가문이 급속도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을 때에도 남편 알폰소 데스테는 루크레치아를 보호해 주었고 보르자 가문이 몰락한 후에도 그녀는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과 문학의 중심지였던 페라라 궁에서 아름답고 훌륭한 귀부인으로 여생을 편히 보내다가 1519년 여덟 번째 아이를 낳고 난 후 출산 후유증으로 인해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루크레치아는 세 번의 결혼과 근친상간, 간통 등의 이유로 살아있을 때도 죽어서도 요부로써 사람들에게 엄청 욕을 먹었는데요.
그녀는 과연 타락한 교황이었던 아버지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지하려 했던 잔인하고 야심 많은 정치가 오빠에게 이용만 당한 가련한 여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저 남성편력이 심했던 요부였을까요?
르네상스 시대에 로마의 악녀이자 불쌍한 여인 루크레치아 보르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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