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공주나 옹주의 남편을 부마라고 불렀습니다.
원래 부마들은 첩을 둬선 안되었지만 이를 어기고 첩을 두었고 아내인 옹주는 눈 감아 주기까지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왕이 낳은 공주나, 옹주의 남편이 되는 양반집 남자들을 부마라고 불렀었습니다.
그러면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인데 양반집 남자들은 부마가 되는 것을 싫어했죠.
왜냐하면 부마가 되면 관직에 나갈 수 없었고 첩도 들이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부인인 공주나 옹주가 먼저 죽더라도 다시 재혼하지도 못했죠.
설사 재혼을 한다 해도 그 재혼한 여자는 정식 부인이 아니라 첩이 되었습니다.
어쩌다 몰래 첩을 들였다가 걸리기라도 하면 유배를 가거나 직첩을 빼앗기기도 했죠.
또한 왕의 딸이 부인이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왕의 딸이다 보니 상전 모시듯 해야만 했고 조금만 잘못해도 수시로 왕에게 불려가 꾸짖음을 당했죠.
그래서 그런지 부마가 된 양반집 남자들은 출세 길은 이미 막혔으니 그저 기생집이나 다니며 평생을 한량으로 사는 경우도 허다했습니다.
그 정도로 부마가 되면 제약이 많았는데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남편인 부마에게 첩을 들이게 도와주기도 하고 오히려 첩에게 남편을 양보하기까지 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바로 중종의 딸로 숙원이씨가 낳은 효정 옹주였죠.
중종 15년인 1520년.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효정옹주가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옹주의 어머니인 숙원이씨는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났죠.
그렇게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읜 옹주가 가여웠는지 중종은 옹주를 더 예뻐했습니다.
돈도 많이 줬고 어쩌다 죄를 지어도 너그러이 용서해 주다 보니 대신들에게 욕도 많이 먹던 아버지인 중종이었죠.
그리고 숙원이씨의 외가에서는 효정옹주에게 '풍가이'라는 여종도 보내줬는데 풍가이는 효정옹주와 비슷한 또래로 같이 글 공부도 하고 어릴 적부터 자매처럼 잘 지냈습니다.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효정옹주는 훗날 순창부사 '조침'의 아들 '조의정'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죠.
시집을 갈 때 자매처럼 친하게 지냈던 여종 풍가이도 함께 궁을 나가 아버지 중종이 마련해 준 효정옹주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 일이 효정옹주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시작점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효정옹주는 그렇게 아버지가 마련해 준 집에 도착했는데 조의정은 그때 함께 온 풍가이를 보게 되었고 첫눈에 반해버린 것이죠.
하지만 부마는 첩을 거느릴 수 없었기에 조의정은 풍가이를 눈으로만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조의정은 풍가이를 예뻐하며 챙기기 시작했고 풍가이 또한 조의정이 그런 호의가 싫지만은 않았죠.
아니, 오히려 좋았습니다.
그러다 효정옹주의 레이더에 남편 조의정이 이상하게 풍가이를 챙기고 예뻐하는 모습이 포착되었고 남편이 내가 데려온 여종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씨 착한 효정옹주는 어릴 적부터 자매처럼 자라오던 풍가이에게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죠.
오히려 조의정에게 비밀로 해줄 테니 풍가이를 첩으로 들이라고 권하기까지 했습니다.
조의정은 그런 아내의 말에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밤마다 풍가이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사랑을 나눴고 그렇게 조의정은 효정옹주의 배려 덕분에 풍가이를 첩으로 삼았죠.
효정옹주는 두 사람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여종인 풍가이에게 남편을 양보한 셈이었죠.
그리고 이 사실이 아버지인 중종의 귀에 들어가면 남편과 풍가이가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을 지켜줬습니다.
또한 그 사실을 숨겨 주기 위해 궁을 나올 때 자신을 따라왔던 유모와 궁녀들도 다시 궁으로 돌려보냈죠.
그 덕에 조의정과 풍가이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서로 열렬히 사랑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셋은 잘 지내는 거 같았죠. 아무 일도 없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궁으로 돌아간 유모와 궁녀들이 효정옹주의 이모이던 상궁 이은대에게 이 사실을 발설해 버렸고 이은대는 곧바로 중종에게 찾아가
전하, 풍가이가 본부인 인지 옹주께서 본부인인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엔 풍가이가 본처 행세를 하는 것 같습니다.
불쌍한 우리 옹주마마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과장 좀 붙여서 아뢰었죠.
그 말에 격분한 중종은 당장 부마 조의정을 잡아들여 순천으로 유배를 보내버렸습니다.
순천은 조의정의 본가가 있는 곳이었는데 그래도 사랑하는 딸의 남편이니 옹주를 위한 배려였던 것이죠.
그리고 동시에 풍가이도 잡아들여 내수사로 끌고 갔습니다.
거기서 풍가이는 상궁 이은대와 여러 궁녀들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은 후 함흥으로 유배를 보내졌죠.
그런데 효정옹주가 아버지인 중종을 찾아와 풍가이를 풀어달라며 하소연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조의정에게 이야기해 풍가이를 첩으로 삼으라 한 것이고 풍가이는 시키는 대로 첩이 되었을 뿐이지 죄가 없다며 말이죠.
하지만 풍가이는 불쌍하고 착한 딸 효정옹주의 남편을 빼앗은 못된 것이라 생각한 중종은 옹주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한편 순천으로 유배를 간 조의정은 사랑하는 풍가이가 함흥으로 유배를 간다는 소식을 접하고 중간에서 그녀를 빼돌렸고 다른 여종을 풍가이라 속여 함흥으로 보내버렸죠.
그리고 풍가이를 순천 본가로 데려와 숨겨놓았습니다.
남편의 그러한 행동 또한 효정옹주는 알고 있었지만 그 둘을 위해 또 비밀로 부쳐 주었죠.
그런 상황인데도 정신 못 차린 조의정은 허구헌날 본가를 드나들며 풍가이와의 밀애를 즐겼습니다.
이러한 조의정의 행각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고 그런 사실을 몰랐던 중종은 얼마 지나지 않아 조의정의 유배 명령을 거두었죠.
그리고 조의정은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면서 몰래 풍가이도 데려왔습니다.
이제 그들의 말 못 할 비밀이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세 사람은 별문제 없이 살았죠.
거기다가 또 좋은 일까지 찾아오는데 그것은 바로 효정옹주가 임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중종은 기뻐하며 조의정에게 가지고 있던 화도 어느 정도 누그러졌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어느덧 옹주의 출산일이 다가왔습니다.
중종은 옹주가 걱정된 나머지 조의정에게 '의녀 보내줄까?'라며 사람을 보내 물었지만 무슨 일인지 조의정에게 돌아온 답변은 전혀 없었습니다.
의녀가 왔을 때 혹시나 풍가이의 존재에 대해 들킬까 염려스러웠던 것이죠.
또한 옹주의 상태 또한 별다른 이상 없이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1544년 2월 15일. 효정옹주는 아들을 출산했는데 이후로 급격히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우물쭈물하던 조의정 때문에 옹주가 그렇게 되고 4일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중종에게 의관과 의녀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죠.
깜짝 놀란 중종은 즉시 의녀를 보냈는데 그 집에 도착해서 들어가려 하자 갑자기 조의정이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내의원 의원과 의녀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옹주는 숨이 멎어있던 것이죠.
그리고 풍가이가 함흥이 아닌 한양에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죠.
공주가 산후증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중종은 이 모든 것은 다 조의정이 내 명을 어기고 첩과 놀아나며 효정옹주에게는 전혀 관심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몰아 세웠습니다.
중종은
조의정의 행동이 매우 수상쩍으니 의금부에서 조사하라.
풍가이는 조의정의 사랑을 믿고 감히 옹주를 능멸하고 집안을 문란케하여 옹주가 남편에게 박대를 당하게 했으며 심지어 죽게까지 했으니 풍가이 또한 아울러 조사하라.
라는 명을 내렸죠.
사랑하는 딸의 죽음에 눈 돌아간 중종은 모든 일은 조의정이 풍가이에게 미쳐 옹주를 죽게 하려고 계획적으로 저지른 일이라고 단정 지어버렸던 것입니다.
조의정의 항변은 전혀 소용이 없었죠.
결국 그는 고신을 빼앗기고 또다시 유배형에 처해졌습니다.
또한 풍가이도 잡혀와 의금부에서 온갖 가혹한 고문을 당했는데 자신은 죄가 없다며 옹주가 주선하여 부마의 첩이 되었고 자신은 그저 상전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당당히 말하며 끝까지 버텼죠.
중종에게는 그저 딸의 남편을 빼앗은 풍가이를 사형시키고 싶었지만 대신들은 풍가이에겐 큰 죄가 없다고 판단해서 장 100대형에 처해졌습니다.
하지만 풍가이는 장 100대를 맞고 나서 거의 반쯤 죽은 채 풀려났는데 그대로 효정옹주의 이모인 상궁 이은대에게 납치를 당했죠.
이은대는 효정옹주의 복수를 하기 위해 타살의 증거를 남기지 않고 풍가이를 죽일 계획이었습니다.
장 100대를 맞으면 거의 대부분 죽거나 살았더라도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죽을 만큼 가혹한 형벌이었죠.
그래서 풍가이 또한 장을 맞아 죽은 것처럼 보일 의도로 10여 일 동안 감금하며 치료도 하지 않고 먹을 것 또한 일체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풍가이가 죽지 않자 이은대는 장을 맞은 부위에 더 심한 매질을 가했습니다.
이은대의 혹독한 매질을 버티지 못한 풍가이는 결국 숨을 거두게 되었죠.
풍가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이은대는 언니였던 숙원이씨가 낳은 정순옹주의 남편과 여종이 간통을 해서 아이를 낳자 아이를 밟아 죽이고 간통한 여종 또한 때려죽인 이력이 있던 잔인한 성격의 여인이었습니다.
이은대는 풍가이를 참혹하게 죽인 죄로 사헌부와 사간원의 상소로 인해 결국 귀양을 가게 되면서 조정을 뒤흔들었던 풍가이 사건은 일단락 되게 되었죠.
조의정은 풍가이가 참혹한 죽임을 당했던 당시에 유배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억울하게 맞아 죽은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결국 효정옹주, 조의정, 풍가이 이 셋 모두 각기 다르지만 쓸쓸하고 불행한 결말을 맺게 되었죠.
효정옹주의 착한 성품과 풍가이의 미모, 조의정의 부마라는 신분 때문에 일어난 조선시대의 비극적인 풍가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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