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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 폭군 간신 탐구

연산군. 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폭군

by 사탐과탐 2022.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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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라고 일컬어지는 연산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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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조선 역사상 최악의 폭군을 꼽으라고 하면 가장 먼저 이름이 떠오르는 인물이죠.

최근 들어서 재평가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은 광해군과는 달리 연산군은 사망한 지 500년이 넘게 지난 현재에도 반론의 여지가 없는 막장 폭군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사실 말년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해서 그렇지 그전까지는 연산군도 나름 괜찮은 왕이었다고 하는데요.

도대체 말년에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길래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같이 안 좋은 평가만을 내리는 걸까요?

 

연산군 이융은 1476년 성종과 왕비 윤씨 사이에서 적장자(정실부인에게서 태어난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단종 이후 오랜만에 나온 적장자 출신 임금이었죠.

세자 시절의 연산군은 매우 평범했습니다.

눈에 띄게 총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훗날 보이게 되는 망나니 기질을 보여주지도 않았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가 폐서인 되고 난 후 새로 들인 중전이 왕자를 낳게 되는데요.

그럼에도 성종 인수대비를 비롯해서 신하들 중 누구도 연산군을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은 것으로 봤을 때 세자시절에는 문제을 일으키지 않고 나름 처신을 잘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렇게 연산군은 1495년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재위 기간 첫해부터 1503년까지는 나름 괜찮은 왕의 모습을 보였다고 하는데요.

비록 왕에게 간언하는 역할을 맡은 대간과는 대립할 때가 많았지만 중요한 국정은 경험이 풍부한 신하들에게 자문을 받으며 잘 이끌어나갔다고 하죠.

여진족이 출몰하자 그들을 몰아낸 후 그들을 정벌하자는 주장까지 했지만 관료들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요.

 

왜구들이 출몰하자 그들도 격퇴해버리고는 비용사라는 관청을 설치해서 조선 군인들의 철제 갑옷을 만들라고 명령하기도 합니다.

의외로 백성들의 삶에도 나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전국 각지에 암행어사들을 파견해서 수령들을 감시하기도 하고 흉년이 들면 조세를 감면해 주기도 했으며 백성들에게 봄에 쌀을 빌려주는 환곡제도를 시행하기도 합니다.

 

물론 공적으로 나라를 운영하는 것이 그럭저럭 정상적이었다는 것이고 사적인 면에 있어서는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살았다고 하는데요.

밥 먹듯이 사냥을 나가고 지방에서 미녀들을 뽑아 궁궐로 불러들이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연산군은 한 나라의 왕이라는 신분이었기 때문에 왕으로서 할 일만 제대로 하고 선을 넘지 않는다면 놀기 좋아하는 사생활 정도는 크게 문제 삼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하죠.

 

또한 이 시기는 조선의 전성기였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해도 연산군의 이 정도 사치는 국정에 딱히 영향을 끼치는 수준도 아니었다고 하네요.

또한 그는 왕실의 어른인 3명의 대비들을 극진히 모셨으며 자기 자신이 나태해지는 걸 경계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왕으로서 충분히 인정을 받고 있었다고 하죠.

 

그러던 와중에 무오사화가 터지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연산군은 사관 김일손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소문을 가지고 성종의 할아버지이자 자신의 증조할아버지인 세조의 명예를 더럽힐 만한 내용을 사초에 실었다는 보고를 받게 되는데요.

김일손을 국문하던 도중 김일손의 스승이기도 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내용이라 생각했고 이는 왕실에 대한 반역이라 판단한 것이죠.

 

진작부터 자신과 대립하고 있던 삼사의 관료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싶었던 연산군은 이 사태를 이용해 신료들에게 직접적인 숙청을 감행하게 됩니다.

결국 연산군은 자신에게 반대하던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의 3사를 날려버리고 아버지인 성종이 했던 경연을 이제부터는 하지 않겠다며 경연을 폐지해버렸죠.

 

비록 연산군이 무오사화로 삼사의 신하들을 숙청하긴 했지만 그중 일부인 사림파에게는 온건한 태도를 보였는데요.

그리고 훈구 대신들의 의견도 크게 수용하는 등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했죠.

하지만 이때 간신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접근하게 되는데요.

그는 폐비윤씨의 친어머니이자 연산군의 외할머니가 살아있음을 알리고 귀양가있는 연산군의 외할머니와 연산군을 만나게 해줍니다.

 

그때 연산군의 외할머니가 폐비윤씨가 사약을 먹을 때 입고 있던 옷을 보여줬고 그 옷에 묻어있는 핏자국을 보는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연산군이 흑화하기 시작했죠.

먼저 그는 성종 시절 폐비윤씨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한 어전회의에 참석한 신하들을 모두 죽이라는 어명을 내리게 됩니다.

그렇게 그 사건의 관련자들중 아직 살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죽게 되고 그 자식들마저 죽음을 맞았으며 사위들은 유배를 보내면서 거의 삼족을 멸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성종 시절 윤씨의 폐비를 논하고 사약을 내리자는 논의를 했던 신하들은 이미 죽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요.

때문에 분노가 풀리지 않은 연산군은 이미 죽어 땅속에 묻혀있던 정인지와 한명회 등의 시신을 파헤쳐내서 부관참시를 해버립니다.

이 갑자사화 때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죠.

 

실록에 따르면 연산군은 한밤중에 아버지 성종의 후궁이었던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폐비 윤씨를 모함했다는 이유로 잡아와서 자루에 넣어버립니다.

그리고 그녀들의 아들인 안양군과 봉안군을 끌고 와서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어머니임을 숨긴 채 죄인을 매질하라고 명령했는데요.

이때 안양군은 사방이 어두워 누군지 모르고 매질했으며 봉안군은 눈치를 채고 차마 매질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연산군은 아들의 손에 목숨을 잃은 귀인 정씨와 엄씨의 시체를 갈가리 찢어 산에 버렸고 어머니를 매질한 안양군과 봉안군은 귀양을 보낸 뒤 사약을 내려 죽여버렸죠.

또한 폐비 윤씨의 죽음에 관련돼있던 자신의 할머니 인수대비의 궁에 칼을 든채 뛰어들어 무례를 저질렀고 인수대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화병으로 사망했다고 하네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두 번의 사화를 거쳐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들을 모두 날려버리고 절대 권력을 손에 쥐게 된 연산군은 그때부터 나랏일은 팽개쳐두고 마구잡이로 놀아제끼기 시작했죠.

먼저 전국에 채홍사와 채청사 등을 파견해서 전국의 미녀와 좋은 말을 구해오게 하며 방탕한 향락에 빠졌습니다.

이 중에서 가장 예쁘거나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추는 자들을 뽑아 '흥청'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이것이 요즘 쓰이는 '흥청망청'이라는 단어의 기원이 됐다고 하죠.

 

연산군은 뒤이어 성균관을 폐쇄하고 학생들을 모두 몰아낸 다음 그곳을 놀이터로 삼았다고 하는데요.

오늘날로 치면 서울대학교를 대한민국 대통령 전용 골프장으로 만든 셈입니다.

그리고 신하들에게는 "입은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내용의 신언패를 차게 했고 자신이 나들이를 갈 때 타는 가마를 메는데도 신하들을 동원시켰다고 하네요.

 

폐위되기 몇 달 전부터는 아예 관료들이 쓰는 모자 앞면에 '충' 뒷면에'성'자를 수놓고 다니게 했다고 하죠.

한 번은 연산군의 악행을 비방하는 투서가 나돌았는데 그것이 한글로 쓰여있었다는 이유로 훈민정음의 교육을 금지시켜버립니다.

 

하지만 정작 얼마 후에 나오는 흥청들의 음악 교본은 모두 한글로 되어 있었다고 하는데요.

아무래도 연산군이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명령을 내리기는 했지만 자신의 조상인 세종의 업적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정말 미친 짓이라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연산군이 고대 로마제국이나 중국의 폭군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죽인 사람 수나 토목공사에 동원한 백성들의 수는 적었지만 그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여색을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연산군의 밝힘증이 어느 정도였냐면 후궁들과 기생들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신하들의 아내까지 은밀히 불러들여 겁탈할 정도였다고 하죠.

거기다가 배다른 누이와 근친상간까지 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역대 조선의 왕들은 평균적으로 600명~700명가량의 궁녀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연산군 시기에만 유일하게 1,000명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연산군의 이런 방탕함은 육체적인 성욕의 해소보다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음으로써 생긴 어머니라는 존재에 대한 심리적 의존증 때문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하죠.

그 증거로 장녹수를 비롯해 연산군이 홀딱 빠져있던 여성상을 보면 죄다 여왕님 기질이 있는 연상의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짧은 기간 동안 수많은 신하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목숨을 잃자 관료들의 마음은 점점 연산군에게서 떠나가고 있었죠.

게다가 높은 세금과 각종 진상품을 바치느라 백성들의 분노도 나날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연산군의 몰락이 시간문제라고 본 신하들은 연산군을 등지고 먼저 그를 치기로 마음먹게 되죠.

결국 1506년 성희안과 박원종 등이 조선 왕조 최초로 신하들이 왕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왕위에 올리게 됩니다.

 

왕에서 군으로 강등된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가서 몇 달 만에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데요.

절대 왕권을 휘두르며 흥청망청 놀고 제멋대로 즐기던 시절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최후였죠.

 

지금까지 조선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라 불리는 연산군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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