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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정화의 대원정. 명나라의 환관 정화가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아프리카 까지 갔었던 대항해 이야기

by 사탐과탐 2024.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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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환관 정화가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아프리카 까지 갔었던
대항해 이야기 정화의 대원정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15세기 초중반 부터 유럽에서는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여러나라에서 큰 함선을 만들어 바다로 쭉쭉 뻗어나갔는데요

 

그런데 사실 유럽의 대항해시대 이전에

중국에서 먼저 대규모 선단을 이용한 대항해시대를 열었었습니다.

 

심지어 이 대선단의 지휘관은 환관이었고

그 대단한 업적을 환관의 신분으로 해냈던 것이죠

 

이 일을 해낸 사람은 명나라의 '정화'라는 환관이었는데요

 

정화는 환관이자 장군이었고, 제독, 탐험가, 외교관, 정치가 등

여러 일들을 두루 해냈던 그런 인물이었죠

 

오늘은 이 정화가 해낸 일곱차례에 걸친 대규모 원정

명나라의 대항해시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원래 정화의 이름은 마삼보로

당시 중국에서는 이슬람교 신자들이 마씨성을 많이 썼다고 하죠

 

그의 선조는 칭기스칸이 중앙아시아를 공격해 들어갔을때 몽골에 귀순한 뒤

훗날 운남성 개발에 참여한 이슬람인이었다고 합니다

 

마삼보 역시 운남성 곤양에서 이슬람을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죠

 

이후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할 당시 운남성을 공격할때

정화는 명나라군에 붙잡힌 뒤 거세 당했고

그렇게 환관이 된 이후에 연왕 주체에게 바쳐졌다고 합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주체가 정난의 변을 일으켜 황위를 찬탈할때

정화 역시 주체를 곁에서 모시며 공을 세웠고

그렇게 '정'이란 성씨를 하사받고 이름을 '화'로 지었으며

환관의 최고위직인 태감이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명나라의 황제가 된 영락제는

뛰어난 정치력으로 내정적인 면에서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외정적인 업적 역시 대단했습니다

 

여러 나라와 지역들을 굴복시켜 영토를 넓히기도 했지만

그 중 특이한 업적이 바로 바다를 통한 대규모 원정을 기획했던 것이죠

 

그렇게 1403년, 영락제는 막대한 재정을 쏟아 부어 대규모로 함대를 만들라 명했고

이때 이 함대의 지휘관으로 이슬람교 출신이자

자신이 믿을 만한 인물인 정화를 내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현재까지도 이 대규모 원정을 하게 된 이유가 불분명한데요

 

그래서 여전히 수많은 썰들이 난무하고 있죠

 

일반적으로 '명나라가 동남아시아나 인도 등지에 여러 조공무역국을 만들어

해외에서 수많은 조공을 받고 세계 질서를 명나라 중심으로 다시 재편한다' 라는

이유로 인해 원정이 행해졌다고 여겨지지만

'행방불명된 건문제를 찾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라는 설도 있고

'티무르제국을 협공할 동맹국을 찾는것'이라는 설도 있으며

아직까지 정확한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지휘관으로 선정된 정화는

중앙아시아나 서역에서 쓰이던 페르시아어 능통자를 고용해

통역원들을 훈련시키는 등 원정에 철저한 준비를 해 나갔죠

 

거기다가 명사에 의하면 원정단의 기함은 '보선(寶船)' 이라고 불리고

총 길이가 약 137m에 폭은 약 56m에 이르는 초대형선박이라고 하며

총 함선 62척에, 27,000여명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인원이 출정하는 정말 대규모 원정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약 8천톤급 규모에 해당하는 엄청난 크기의 함선이었는데

여기엔 수군 뿐만아니라 역관과 의원, 천문가, 승조원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원정을 떠났다고 하죠

 

훗날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 다가마의 함대가 120톤급에

총 승무원이 170여명,

그리고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의 함대 역시

250톤급에 총 승무원이 88명에 불과했던걸 비교하면

역시 과거부터 대륙의 스케일은 남다른것 같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배가 너무너무 크기도 하고

배에 타는 인원수도 너무 많다보니

모두 거짓이라며 많은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어쨌든 그렇게 준비를 완벽히 다한 정화는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1405년 6월, 드디어 제1차 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정화의 원정함대는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고 하며

막대한 양의 보물들이 실려 있었다고 하죠

 

이는 원정을 하면서 거치는 수많은 나라에

명나라의 군사력과 부를 동시에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도착하는 나라에 방문해 명나라에 조공을 요구하고

명나라에서 생산되는 비단과 도자기를 가지고 가

동남아시아 지방 및 인도 등 여러 지방에서 생산되는

진귀한 보석이나 수많은 동물들, 여러 광물 등을 교환해

무역을 이끌어내는 등의 목적도 있었죠

 

그렇게 난징에서 출발한 대선단은 중국의 남서쪽 연안을 통해

참파와 수마트라르 거쳐 인도네시아 팔렘방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광동성 출신의 한족이던 해적 진조의가

그곳에 있던 왕을 몰아내고 자신이 지배자 노릇을 하면서 살고 있었죠

 

그러자 정화는 공격을 하기 시작해 진조의를 생포할수 있었고

그렇게 진조의의 압송을 위해 다시 명나라로 돌아왔습니다

 

이에 영락제는 굉장히 흡족해 하며 해적 진조의를 처형시켰고

이로 인해 인도양에 있는 다른나라들이

명나라 원정대에 대해 신뢰를 보내게 된것이죠

 

또한 1차 원정 이후 명나라와 원래 교류가 없었던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게서 조공을 받을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락제의 명령에 따라

돌아온지 불과 10일만에 2번째 원정을 떠나게 되었는데요

 

이후엔 더 서쪽인 태국과 말라카, 자바, 실론(스리랑카)을 거쳐

인도의 서해안인 캘리컷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캘리컷을 찍은 정화의 선단은 일단 다시 명나라로 돌아가

더 단단히 준비를 한 다음, 더 먼 서쪽으로 가기로 마음먹었죠

 

그렇게 귀국하는길에 실론에 들러 한문과 페르시아어, 그리고 그곳 현지어까지

3개 국어로 정화의 원정이 그곳에 닿았음을 증명하는 비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정화의 원정대는 공격을 당하게 되는데

바로 실론의 감폴라 왕국의 알라케스바라 왕이

실론에 상륙한 명나라 선발대를 몰살시켜 버린뒤 약탈을 했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때 정화는 병력수가 딸리자 일단 명나라로 귀환을 했고

1409년 여름, 3차 원정을 떠나면서 복수를 위해 실론으로 향하게 되었죠

 

그리고 감폴라 왕국에 공격을 감행해 왕궁을 급습,

알라케스바라 왕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신하들까지 모두 사로잡아

명나라로 압송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정화는 그곳의 새로운 왕으로

옛 왕족의 후예인 파라크라마바후 6세를 왕으로 세웠죠

 

이 파라크라마바후 6세는 훗날 코테왕국을 세우게 됩니다

 

이후 정화의 원정대는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해 캘리컷에 도달했고

이후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와

아라비아 반도 남쪽의 아덴에까지 도착할수 있었죠

 

여기서 뱃머리를 돌려 다시 명나라로 귀환하게 되는데

귀환 하는 도중 조공국이던 수마트라왕이 반란세력의 토벌을 요청해

수마트라 섬 북부의 반란군을 진압해주기까지 하면서

명나라의 위상을 드높였고 그렇게 1411년 7월 명나라에 귀국을 했습니다

 

4번째 원정은 2년후인 1413년 11월에 출발을 하게 되었죠

 

여러번의 원정으로 노하우가 쌓였던 덕분인지

이번엔 아프리카 서쪽의 케냐에 도착하게 되었고

케나 말린디의 특사가 정화에게 '기린'을 바쳤습니다

 

원래 기린은 동양의 전설속에 존재하는 상상 속 동물이었는데요

 

케냐의 특사가 이 동물을 게린(Gerin)이라고 부르자

정화와 원정대 사람들은 이를 상상속 동물인 기린으로 여겼었다고 하죠

 

이후 케냐의 특사는 영락제를 만났는데

영락제는 기린을 선물로 준것에 기뻐하며 특사에게 큰 상을 내렸고

기린을 그림으로 기록해 두라고 명령했습니다

 

4차 항해 이후 명나라의 무역활동은 인도보다 서쪽인

호르무즈와 케냐까지 확장되는 대단한 업적을 세웠던 것이죠

 

이후 1417년에 떠난 5번째 원정에서는 소말리아 모가디슈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사자와 표범, 얼룩말, 코뿔소 같은

진귀한 동물들을 실어올수 있었으며

1421년 1월에 떠난 6차 원정은

지금까지의 원정과는 달리 조공을 바쳤던 여러 나라들의 특사나 사신들을

다시 자국으로 데려다주기 위한 원정이었습니다

 

이때 아프리카, 인도, 아라비아, 동남아시아 등

30여개국에 달하는 사신들을 자국으로 돌려보내주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6차 원정 이후 항해를 중단하게 되는데요

 

이때 명나라의 수도는 베이징으로 옮겨가 있기도 했고

정화 원정대의 보급기지 노릇을 하던 팔렘방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일어나 상황이 좋지 않았으며

이때 분쟁해결을 위해 정화는 다시 팔렘방으로 떠나게 되었는데

다시 돌아왔을땐 이미 영락제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이죠

 

이후 황제로 즉위한 홍희제는 다시 남경으로 천도를 원하기도 했고

재정상의 이유를 들어 원정은 무기한 연기 되었습니다

 

그렇게 정화는 수비태감에 임명되어

난징으로의 천도 준비를 맡게 되었죠

 

하지만 수도가 난징으로 옮겨지지 못한채 홍희제 마저 1425년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이후 선덕제가 황위에 오르게 됩니다

 

선덕제는 다시 원정을 재개하기로 결정하고

정화를 다시 원정의 지휘관을 맡으라고 명했죠

 

하지만 정화는 이미 환갑의 나이로 너무 나이가 많아 거절하려 했으나

자신을 대신할 인물이 없다고해서 결국 7차 항해의 지휘를 맡게 됩니다

 

그렇게 1431년 12월, 대망의 7차 항해를 떠나게 되죠

 

7차 항해때 원정대는 메카에 까지 도달할수 있었다고 하고

이슬람교 출신인 정화는 메카에서 참배까지 드릴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늙은나이에 원정을 떠나다보니 몸이 약해졌는지

1433년 4월, 항해에서 복귀하는 도중 세상을 떠났다고 하죠

 

이후 시신은 원정대 관례에 따라 인도양 바다에 수장되었고

명나라에는 가묘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정화가 죽고난 이후부터 항해를 재개할것인지 논의되긴 했지만

그를 대신할 인물이 없기도 했고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 원정에 반대하는 이도 많았기에

이후 명나라의 대규모 원정은 막을 내리게 되었죠

 

아쉬운점은 정화가 기록한 원정대의 정식기록은

성화제 시절 병부시랑이던 유대하라는 인물이

병부에 보관되어있던 원정의 기록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는 것인데요

 

그러자 병부상서였던 항충이 유대하를 질책하자

유대하는 "이 대규모 원정은 국고를 낭비하고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지만 기껏 얻은건 외국의 신기한 물건 뿐입니다

이걸 어찌 후대사람이 본받을 일이겠습니까!?" 라고 말했고

항충은 그말이 맞다 생각했는지 그냥 넘어갔다고 하죠

 

하지만 다행인점은 정화의 부하로 원정에 동행했던

마환(馬歡)의 《영애승람》(瀛涯勝覽)과

비신(費信)의 《성차승람》(星槎勝覽),

그리고 공진(鞏珍)의 《서양번국지》(西洋番國志)등이 남아있어서

현재 매우 귀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고 합니다

 

이 대원정은 유럽의 대항해시대보다 70여년이나 앞섰기 때문에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정화 역시 후대에 환관의 영웅으로 불리고 있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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