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에서 유래없는 굉장히 위험하지만 위대했던 에베레스트
원정 한국인이었기에 가능했던 산악사에 길이남을
위대한 원정 휴먼원정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2004년 3월 12일, 계명대학교에서는 개교 50주년 기념으로
2004 개명대학교 에베레스트 원정대 발대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50주년 기념으로 계명대 산악회가
단독 에베레스트 등정에 나서게 된것이었죠
그렇게 원정대 단장으로 김상홍,
그리고 원정대장으로는 배해동,
등반대장으로 박무택, 부대장 백준호 등
총 9명으로 구성된 원정대가 꾸려졌고
이들은 설악산, 팔공산 등에서 팀웍 향상과 체력증진,
그리고 심폐기능 강화를 위한 훈련을 한뒤
마침내 2004년 4월 7일 에베레스트 5200m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4월 9일부터 5월 14일까지
5800m 캠프1, 6300m에 캠프2, 이런식으로
8300m에 캠프5까지 설치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계명대 개교 50주년 기념일인 5월 20일에 에베레스트 정상에
학교 깃발을 꽂을 계획이었죠
원정대 대부분은 7천미터 이상 높이까지 올랐던 경험이 있던 멤버로써
특히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를 등반대장 박무택은
히말라야 8천미터급 14개봉 중 1,2,3,4위 봉인
에베레스트와 K2, 칸첸중가 그리고 로체 등정에 성공했었던
베테랑 산악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네팔 촐라체봉 (6,440m)은 세계 최초 겨울 등정이라는
기록까지 갖고있기도 했죠
박무택 등반대장은 "이번 등반을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왔고,
학교의 개교 50주년 기념 사업으로 추진되는 만큼
반드시 성공해 에베레스트 정상에 학교 깃발을 꽂겠다" 라고 말하면서
자신감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또한 칸첸중가, K2, 시샤팡마 등 여러 험준한 고봉을 오르내리며
삶과 죽음의 고비를 함께 해왔던 동지이자 선배였던
한국 대표 산악인 엄홍길과도 굉장히 친했던 박무택은
당시 네팔 카트만두에서 다른 원정길에 있었던 엄홍길과도 만났는데
이때 엄홍길은 박무택에게 "둘 다 성공해서 한국에서 보자" 라고 말했다고 하죠
그렇게 박무택은 에베레스트로 향했고
엄홍길은 15좌 얄룽캉에 등정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마침내 시작된 에베레스트 등정은 계획하고 목표한것 처럼
성공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었는데요
그들은 5월 14일에 캠프5까지 설치를 성공했고
드디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르는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5월 20일이 되자, 박무택과 장민 대원은
엄청나게 추운 날씨와 산소마저 희박한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죠
그렇게 마침내 두사람은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성공해
계명대학교 깃발을 정상에 꽂은뒤 "여기 정상입니다!" 라고 무전을 보냈습니다
초조하게 그들의 무전을 기다리던 캠프에서는
치직 거리며 들려오는 무전을 듣고 환호성이 터져나오며
축제분위기로 바꼈죠
하지만 이 환희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얼마안가 박무택에게서
"장민이가 탈진 했습니다" 라는 무전이 온것이었죠
심지어 그들의 위치는 얼음과 바위가 뒤섞여 있어서
가장 험난한 암벽구간인 곳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곧이어 캠프에 더 충격을 주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박무택은 "상황이 안좋습니다, 설맹이 옵니다. 앞이 안보입니다" 라고
무전을 해온것이었죠
너무나도 절망적인 조난 상태에 빠지자
캠프에서는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취해 봤지만
그들을 도와줄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산위에서 둘다 죽을순 없었던 박무택은
오랜 설득 끝에 장민 대원에게 먼저 내려가라고 말하고 내려보냈고
그는 춥고 기나긴 밤을 에베레스트 정상 근처에서
혼자 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죠
그리고 오후 3시쯤 박무택에게서 또다시 무전이 왔는데
"더이상 못 움직이겠습니다. 비박을 해야겠습니다" 라는 내용이었고
그로부터 40분후 "고통스럽습니다. 못견디겠습니다.
산소가 없어요, 숨을 못쉬겠어요" 라는 무전을 마지막으로
박무택은 더이상 연락이 없었습니다
또한 오후 1시쯤에 먼저 내려갔던
장민도 베이스캠프로 돌아오지 않았죠
절망에 빠진 캠프에서는 외국 원정대들을 직접 찾아가
구조 활동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했지만
도와주는건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사람만이 박무택을 구조하러 출발했는데
그는 바로 박무택과 무전을 주고 받았던 백준호 부대장이었죠
그는 "내가 가서 무택이 데려올께" 라는 말을 남기고
다음날 날이 밝는대로 셰르파 한명과 함께 박무택을 구조하러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탈진한채로 설맹에 걸린 사람을 혼자 구조하러 가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죠
하지만 백준호와 박무택은 수많은 세월을 함께 산에서 보낸
둘도 없는 사이였던 만큼 올바른 판단을 할수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어쨌든 백준호는 우여곡절 끝에 눈속에 파뭍혀 있다시피한
박무택을 발견할수 있었는데요
그러나 박무택은 이미 너무 동상이 심했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으며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함께 온 셰르파는 먼저 산을 내려갔고
백준호는 박무택의 곁을 한동안 지키다가
하는수없이 혼자 하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백준호 마저 하산 도중 실종되어
원정대 대원중 3명이 사망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죠
한편 얄룽캉을 등정 후 하산을 하던 엄홍길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세명 중 둘은 온데간데 없이 실종되었지만
박무택의 시신은 암벽 중간에 로프째로 매달려 있다고 하는것이었죠
그리고 이후 등정하는 산악인들에게서도
박무택을 봤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고
심지어 백준호와 함께 박무택의 구조를 위해 올라갔던 셰르파는
시신의 대략적인 위치까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엄홍길은 이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죠
그 이유는 자꾸 박무택이 눈에 밟혀서 였습니다
홀로 외로히 추운 산 한가운데 매달려 있을 후배가 너무 애처로웠던 것이죠
그리고 오랫동안 고민끝에 엄홍길은
박무택의 시신을 수습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쉽게 생각하면 시신도 보이니까 가서 데리고 오면 되겠다 생각할수 있지만
일단 혼자 올라가는것 자체도 목숨이 위험한 일인데
죽은 동료의 시신을 수습해 온다는것은
세계 어느 원정대에서도 시도 조차 하지 못한 위험한 일이었죠
문제는 어딘가에 있다고 해도 눈에 파뭍혀 있을수도 있고
대략적인 위치만 알기 때문에
에베레스트에 올랐다 하더라도 직접 수색 작업을 벌였어야 했으며
시신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암벽 구간에서 시신을 떼어내는데도
엄청난 체력 소모가 있을것이었습니다
또한 이런곳에 방치된 시신은 오랫동안 눈과 얼음이 들러붙어
100kg이 넘을정도로 굉장히 무거워지기 때문에
성인남자 여러명이 같이 옮겨야 하는데
길이 동네 뒷산 등산길처럼 잘 닦여져 있는것도 아니라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시신 한구 수습 하러 갔다가
여러구를 수습해야 하는 일이 벌어질수도 있는
너무너무 위험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여태껏 유례가 없는 시도였기 때문에
세계적인 산악가인 라인홀트 메스너는 "같이 산에서 죽을것이다" 라고 하기도 했고
만약 성공하더라도 이 성공소식에 다른나라의 산악인들도 시도하다가
더 많은 희생자가 생겨날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반대했다고 하죠
그러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 일에
과거 엄홍길과 함께 산을 오르던 동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동료대원의 시신을 추운 얼음산 한가운데 외롭게 내버려 둘수는 없다는
우정과 의리로 뭉친이들 덕분에 마침내 '휴먼원정대'가 꾸려졌죠
그리고 드디어 2005년 3월 14일,
휴먼원정대는 에베레스트를 향해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베이스캠프에서 다시 한번 박무택 시신의 위치를 들은뒤
마침내 에베레스트를 오르게 되었죠
그리고 오랜 준비 끝에 마침내 D-DAY를 5월 17일로 잡았습니다
그런데 체감상 초속 20m에 육박하는 엄청난 바람이 불었고
18, 19일에도 마찬가지로 태풍에 근접하는 바람세기로 인해
결국 등반 실패를 하고 말았죠
그리고 마지막 D-DAY를 5월 29일로 다시 잡았습니다
마침내 그날이 오자 새벽 3시경 원정대는 두팀으로 나눠
수습 작업에 돌입했죠
엄청나게 추운 날씨와 거센 눈보라를 해치며
우여곡절 끝에 목표지점 근처에 도착한 원정대는
얼마간의 수색을 거쳐 5월 29일 오전 9시,
드디어 로프에 매달린 박무택의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절벽에 얼음과 함께 들러 붙어 있었던 시신은
아무리 팔과 로프를 당겨도 꿈쩍도 하지 않는것이었죠
결국 피켈을 이용해 시신을 떼어내기 시작했는데
그 추위 속에서 장장 3시간의 걸친 작업끝에 결국 시신을 떼어내는데 성공했지만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바로 박무택의 돌출된 채 굳은 여러 부위들로 인해
시신을 들것에 실을수가 없었던 것이죠
결국 엄홍길은 그냥 시신을 자일로 묶어서 내려오라 명령했고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엄홍길과 얼음덩어리가 되어버린 박무택은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꽁꽁 언 박무택의 시신을 보자마자 엄홍길은 시신을 끌어안으며
쉰 목소리로 "무택아 무택아, 네가 왜 여기 있니. 집사람, 어머니, 아들이 기다리잖아.
이제 나랑 같이 가자" 라며 통곡했죠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시신을 운구하기 시작했는데
100kg이 넘는 시신은 대원들이 전부 달라붙어
두시간 이상을 옮겼지만 고작 100m 정도밖에 이동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기상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하면서
이대로 계속 시신과 함께 내려가다가는
또다른 사고가 터질 가능성이 높았죠
그러자 엄홍길은 네팔의 풍경과 티벳의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해가 하루종일 비치는 곳이 있다며
조금만 더 가서 그곳에 박무택의 시신을 묻어주자고 말했습니다
휴먼원정대 대원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수없이 그럴수밖에 없었죠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 도착한 원정대 대원들은
박무택의 시신을 두고 돌무덤을 쌓아주었고
엄홍길은 베이스캠프에 눈물을 흘리며
박무택을 묻어주고 있다는 무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엄홍길은 홀로 남겨진 박무택이 추위에 떨지 않도록
맨손으로 있는 박무택의 시신의 손에 장갑을 끼워 주고
옷깃을 여며주었죠
그리고 내려오는 도중 함께 실종되었던 백준호와 장민의 시신을 찾고자 했지만
이미 너무 많은 체력을 소진한 상태였고
부상자도 속출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두사람의 수색작업은 결국 다음을 기약할수 밖에 없었죠
이후 모두 안전하게 내려온 휴먼원정대 대원들은
6월 4일에 고인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는 위령제를 열었고
전세계 산악사에 길이남을 위대한 원정이 끝을 맺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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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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