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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쿨리. 내용도 모르는 계약서에 사인하고 끌려가 노예가 되버린 중국인 노동자들

by 사탐과탐 2024.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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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도 모르는 계약서에 사인하고 끌려가 노예가 되버린 중국인 노동자들
중국인 노예 쿨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플랜테이션'이란 자본과 기술을 가진 선진국이나 거대기업이

다른 나라에서 현지의 원주민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을

적은 돈을 주고 고용하거나

강제적으로 노동시켜서 농사를 짓는 방식을 말하는데요

 

과거 유럽의 백인들은 이 플랜테이션에 필요한 노동력을 구하기 위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식민지에 데려가 노예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노예무역이 1800년대 초 영국에서

비효율적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금지되면서

더 이상 아프리카 노예들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죠

 

때문에 백인들은 아프리카 노예들을 대체할 노동력을

이번에는 동양에서 찾으려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동양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두 곳

중국과 인도에서 인력을 구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쿨리'가 탄생했습니다

 

청나라가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 제국과 체결한 베이징 조약 중에는

당시 해외이주를 제한하던 청나라에게

백성들이 해외로 이전할 자유를 보장하라는 내용이 있었죠

 

때문에 청나라 조정은 백성들에게

'청나라인이 해외에 나가 일자리를 얻는 것은 자유이며

이를 위해 영국의 선박에 탑승하는 것은 완전히 자유이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후 청나라 내에서는 딱히 먹고살 방법이 없는 하층민들이

돈을 벌기 위해 백인들과 계약을 맺고 해외로 나가서 일을 하려 했는데

앞에서 말했듯 노예무역은 이미 금지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백인고용주들은 흑인노예들을 마구 부려먹을 때와는 달리

쿨리들에게는 계약서를 작성한 후 일을 시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쿨리들은 사회의 최하층민들로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고 글조차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죠

때문에 자기가 무슨 내용의 계약서를 쓰는지도 모른 채

그저 서명을 하기 바빴다고 하는데요

 

백인 고용주들은 이런 상황을 이용해

노예계약과 다를 게 없는 불공정 계약을 맺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런 현실을 잘 보여준 것이 바로 마리아 루즈 호 사건이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페루로 향하던 마리아 루즈 호가 수리를 위해 요코하마에 잠시 배를 댔을때

쿨리 한 명이 배를 탈출해 일본 정부에 구조를 요청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일본이 마리아 루즈호의 출항을 금지시키고 조사를 한 결과

 

그 배에 타고 있던 모든 노동자들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으로

계약서가 어떤 내용인지도 알지 못한 채

노예나 다름없는 비인간적인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는 게 드러났죠

더 충격적인 사실은 자발적으로 계약을 한 사람은 얼마 되지도 않고

대부분이 납치를 당해 끌려 온 사람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으로 간 쿨리들은 주로 태평양 근처에 있는 미국 서부 지역에서 일했는데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 탓에

계약 기간을 채우기도 전에 죽는 인원이 전체 노동자의 80퍼센트나 되었다고 하죠

속았다는 걸 깨달은 쿨리들이 고용주에게 반항을 하거나

고향으로 탈출을 시도하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고 합니다

 

쿨리들이 얼마나 혹독한 대우를 받았으면

당시 기회의 땅이라고 불리던 미국 서부에서조차

'중국인들에게는 아무런 기회가 없다'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라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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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백인들이 아무 이유 없이 중국인들이 사는 마을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그들을 학살하는 사건까지 있었지만

학살을 저지른 백인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국의 대륙횡단철도는 1863년부터 1869년까지 6년 동안

미국 동부의 철도망을 서쪽으로 연결해 건설된

2800킬로미터가 넘는 철도를 말하는데

중국계 미국인들의 후예들은 이 대륙횡단철도를

자신들의 조상이 만든 것이라고 자랑하며 뿌듯하게 여긴다고 하죠

 

영화에서 미국의 개척시대가 나오면 어김없이 쿨리가 등장하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미국의 대륙을 횡단하는 이 초장거리 철도공사는

말 그대로 사람을 갈아 넣어가면서 했던 공사로

철도의 레일밑에 깔리는 침목 하나가 설치될 때마다

쿨리가 한 명씩 죽었다는 소문이 들렸을 정도로

수많은 쿨리들이 가혹한 노동환경에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 시절 우리나라에도 쿨리들이 많이 건너왔는데

특히 인천항의 부두에서 일하는 항만 잡부가 많았기 때문에

현재 인천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차이나타운이 들어서 있다고 하죠

 

쿨리들 중에는 산둥성의 가정식이었던 작장면을

인천항에서 일하던 부두 노동자들에게 파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 작장면이 한국인들의 입맛에 맞게 개량된 음식이 바로 짜장면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쿨리들 중 중국인들 못지않게 많은 수를 차지했던 것이 바로 인도인들이었죠

1899년 인도 대기근이 일어났을 당시

3만 명이 넘는 인도인들은 먹고 살 방법을 찾아다니던 끝에

우간다에 철도를 짓는 공사에 투입된다는 계약을 영국인 고용주들과 맺게 되었고

얼마 후 그들은 아프리카로 보내졌습니다

 

하지만 쿨리들은 최악의 환경에서 노동착취를 당하는 것도 모자라

일하는 도중 아프리카에 사는 맹수들의 습격까지 받아야만 했죠

때문에 3만 명 중 2500명이나 되는 쿨리들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철도가 완성된 이후 쿨리들 중 딱히 고향에 남겨놓은 재산이 없거나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던 사람들은 인도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도에 있던 가족들을 데려오게 되면서

수많은 인도인들이 아프리카로 넘어오게 되죠

 

이후 그들은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와 케냐

우간다 일대의 상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963년 케냐와 우간다, 탄자니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는 데 성공하면서

대부분의 쿨리들이 현지의 국적을 포기하고 영국과 캐나다

호주, 미국 등으로 이민을 떠나게 되죠

 

1970년대 초반 우간다의 독재자였던 '이디 아민'은

우간다에 살던 인도인들을 "얼굴에 구두약을 바른 백인"이라고 욕하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해 버린 후 추방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난 세월 자신들을 억압했던 백인들을 쫓아내 버리는 것처럼 쇼를 하면서

현지 흑인들의 인기를 얻으려 한 것인데요

그런 현상이 아프리카 곳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아프리카에 살던 인도인들 중 많은 수가 다시 이민을 가게 된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일본인들에게 속아 넘어가 해외로 가면서

쿨리들과 비슷한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요

이들은 대한제국 시절 멕시코로 건너가 '애니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그 이유는 당시 그들이 주로 '에네켄'이라는

식물을 재배하던 농장에서 일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900년대 초반 멕시코는 일본에 이주노동자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해왔죠

하지만 1897년 최초로 멕시코에 파견했던 일본인 이주노동자 34명이

멕시코인들의 구타와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전원이 도망간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자국민들을 노동자로 보내는 대신 인천에서 일본인 브로커들을 이용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조선인들을 사기 계약으로 속여 멕시코로 보내버렸다고 합니다

 

일본인 브로커들은 모집광고를 할 때는

주택을 무료로 임대해 주고 높은 임금을 준다는 조건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그 모든 조건이 사기였던 것이죠

 

멕시코에 도착한 그들은 새벽 4시부터 해가 질 때까지

40도가 넘는 날씨에서 엄청난 강도의 노동을 해야 했으며

받는 임금 이상의 수수료와 체류비를 내야만 하는 계약조건 때문에

조선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사실상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로 인해 멕시코에 왔던 이들은 무국적자가 되어버리면서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한 채 멕시코에 완전히 눌러살게 되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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